11. 옛사람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 스님들의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의 뜻을 깨닫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공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즉 옛 스님들의 말씀은 마치 큰 불덩어리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그 가운데 어떻게 앉아보고 누워볼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말씀에다 다시 이러니저러니 분별을 일으켜 자기 신명을 망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12. 선에서의 바른 믿음

   이 공부[禪]는 교학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대승을 공부해 온 사람도 선(禪)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성문 연각을 공부하는 소승에 있어서랴! 3현 10성(3현(賢)위와 10지(地)위를 말함.)이 어찌 교(敎)에 통달하지 못했을까마는 오직 참선하는 일에 대해 설법할 때만은 그렇지 않아서 3현 보살은 간담이 떨리고 10지 보살도 혼이 빠진다고 하였다. 또한 등각보살도 마찬가지이다. 등각보살은 비오듯 자재한 설법으로 무량한 중생을 구제하시며 무생법인(無生法忍 불생불멸하는 진여 법성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보살이 초지(初地)나 7ㆍ8ㆍ9지에서 얻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소지장에 막혀 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선종에서는 범부에서부터 완전히 부처와 똑같다고 한다. 이 말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데가 있겠으나, 믿는 사람은 선(禪)을 할 수 있는 그릇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근기가 아니다. 모든 수행자가 이 방법을 택하려 한다면 반드시 믿음으로부터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믿음 이란 말에도 그 뜻이 얕고 깊은 차이와 바르고 삿된 구별이 있으므로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이 얕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에 입문한 이라면 뉘라서 신도가 아니라고 자처할까마는 그런 사람은 단지 불교만을 믿을 뿐 자기 마음을 믿지 않으니 이것을 말한다. 믿음이 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대승보살도 아직 믿음을 갖추었다 할 수는 없으니, [화엄경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설법을 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듣고 있구나.' 이렇게 의식하면 그 보살은 아직 믿음의 문턱에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가령 [화엄경]에 나오는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즉심시불(卽心是佛)]" 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가 다 믿노라고 한다. 그런데 "네가 부처냐?" 라고 묻게 되면 영 어긋나버려서 알아듣지를 못한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다해서 아무리 재어보아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생각을 다해 재보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벌써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 이라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 이라 한다. 그대로가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 자기 마음으로 직접 맛보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얼굴만 번듯하고 속은 어리석은 노름꾼 같은 이는 단지 말로만  마음 그대로가 부처 라고 떠들 뿐이지 사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삿된 믿음' 이라고 한다.

13. 본체를 보아야 선정에 든다

   옛 선사는 복숭아를 따다가도 문득 정(定)에 들고,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문득 정에 들었으며, 절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선정(禪定)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한 곳에 오래 눌러앉아 외연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정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 이라고 하니, 이는 납자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아니다.
   육조혜능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 속에 계셨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실 때가 없었다."
   모름지기 본체를 확실하게 보아야 비로소 이러한 선정과 하나가 된다. 석가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와 왕궁에 태어나시고, 설산에 들어가 샛별을 보고 허깨비 같은 중생을 깨우쳐주신 일들이 모두 이 선정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뜬 경계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들뜬 경계에 있어서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하든 들뜨든 간에 전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여기서 무엇을 가지고 경계를 삼겠는가? 이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면 세상이 온통 정(定)이라는 하나의 몸으로 꽉 차서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14. 세간법에서 자유로와야 한다

   참선하는 납자는 세간법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불법에도 오히려 조금이라도 집착해서는 안되거늘 하물며 세간에 매달려서야 되겠는가. 만약 화두공부가 제대로 되면 얼음을 뒤집어써도 차가운 줄을 모르며, 불을 밟고 가도 뜨거운 줄을 모르며, 가시덤불을 지나가도 걸리거나 막히는 일이 없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세간법에서도 자유로와진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바깥 경계에 끄달린다.
   여기에서는 조그만큼의 공부를 이루려 해도 당나귀해(12간지에 없는 해로, 실현될 가능성이 없음을 비유함)가 되도록 끝없이 기다려 보았자 꿈속에서도 공부의 진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15. 언어 문구를 배우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문구를 따져 연구하거나 옛사람의 말씀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이러고서는  마음의 움직임이 완전히 끊긴 자리에 이르려 한들 되겠는가.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