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4.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임제 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불법은 애써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 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佛敎]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 된 사람[俗人]이다.
  
   대저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안목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범부와 성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가려낼 수 있다면 참된 출가라고 할 것이지만 부처와 마군을 구분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나와 도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한 개의 부처인 마군이 있어서 같은 몸이 되어 나눌 수 없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위의 왕은 우유만 먹는다. 눈 밝은 도인이라면 마군과 부처를 함께 쳐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무엇이 부처인 마군입니까?”
   “그대의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바로 마군이다. 그대가 만약 만 법이 본래 태어남이 없는 이치[萬法無生]를 통달하면 마음은 환영과 같아지리라.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어딜 가나 청정하리니 이것이 부처다. 그러나 부처와 마군이란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 경계다.
   산승의 견해에 의한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어서 얻을 것은 바로 얻는다. 오랜 세월을 거치지 않는다.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모든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보다 더 나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바로 지금 눈 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디를 가나 막힘이 없고 시방세계를 꿰뚫어 삼계에 자유 자재한다.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는다. 한 찰나 사이에 법계를 뚫고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 모든 국토를 다니며 중생들을 교화하지만 일찍이 일념을 떠난 적이 없다. 가는 곳마다 청정하여 그 빛이 시방법계에 사무쳐서 만법이 한결같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라면 본래 아무런 일이 없는 줄을 오늘에야 알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를 못하는 것이다.
  
   저 원교보살 돈교보살[圓頓菩薩]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에 있으며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한다. 이런 무리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지 달리 다른 시절이 없다.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그때그때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이다. 실다운 법이란 전혀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참된 출가이다. 하루네 만 냥의 황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쉽사리 제방의 노사들에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나는 선(禪)을 알고 도(道)를 안다.’고 지껄이지 말라. 설법이 폭포수처럼 말솜씨가 유창하다하더라도 이는 모두 다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다.
   만약 참되고 바르게 도를 배우는 이라면 세상의 허물을 찾지 않는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구하는 일이 간절하고 급박하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를 통달하여 뚜렷이 밝으면 비로소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입니까?”
   “그대들은 언제 어디서나 범부에도 들어가고 성인에도 들어가며 더러움에도 들어가고 깨끗함에도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 나라에도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나불의 법계에도 들어가서 곳곳마다 국토를 나타내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시어 큰 법륜을 굴리시고 다시 열반에 드시지만 가고 오는 모양을 볼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는 생사를 찾아도 마침내 찾을 길 없다. 곧 무생(無生) 법계에 들어가 곳곳에서 국토를 노닌다. 화장세계에도 들어가 모든 법이 다 텅 비어있어서 전혀 실다운 법이 없음을 다 본다.
   오직 법을 듣는 사람,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의지함이 없는 데서 생겨난다. 만약 의지함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부처라는 것도 얻을 것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인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명칭과 글귀에 집착하여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에 구애되므로 훌륭한 식견[道眼]이 막혀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저 십이분교(十二分敎)도 모두 이치를 보여주기 위한 설법인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명칭이나 글귀에서 알음알이를 낸다. 이것은 모두 무엇에 의지하고 기댄 것이라서 인과(因果)에 떨어지며 삼계에서 생사에 윤회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여라. 이 사람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뿌리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수만 가지 상황에 맞추어 펼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작용에도 정해진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난다. 그것을 일러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않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곧 덧없음[無常,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을 하겠느냐? 그저 밥 한술 찾아먹고 누더기를 꿰매며 시간을 보내는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참문(參問)하는 일이다. 그럭저럭 즐거운 일이나 쫓아 지내지 말라. 시간을 아껴라. 순간순간 덧없이 흘러가서 크게 보면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것이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변화에 쫒기고 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지수화풍과 생주이멸의 형상 없는 경계를 잘 알아서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무엇이 네 가지 형상이 없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이 되어 가로 막으며, 한 생각 애착하는 마음이 물이 되어 빠지게 하며,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이 되어 타게 하며,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이 되어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할 것이다.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서 사라지고, 가운데서 나타났다가 가장자리에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나타났다가 가운데서 사라진다.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꿈과 같고 허깨비같은 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사대육신이 아니지만 그대들의 사대육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무름에 자유자재가 될 것이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아무것도 꺼려할 것이 없는 이치다.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
   그대들의 한 생각 차별 없는 빛이 어디에나 두루 비치는 것이 진짜 보현보살이고,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줄 알아서 어딜 가나 해탈하는 그것이 바로 관음보살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되어 나올 때는 한꺼번에 나오니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비로소 경전에 설해져 있는 가르침을 잘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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