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1. 사료간(四料揀)

   임제 스님이 저녁법문[晩參]에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에 사람[주관]을 빼앗고[부정함], 경계[객관]를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그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떠오르니 땅에 비단을 편 듯하고, 어린 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희구나.”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의 명령이 이미 떨어지니 천하에 두루 시행되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전쟁을 할 일이 없어졌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을 끊고 각기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 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임제 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요즘 불교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하는 일이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만 얻는다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부터 선지식들은 모두가 그들만의 특별한 교화의 방법[路]이 있었다. 예컨대 산승(山僧)이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은 다만 그대들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할 뿐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병이 어디에 있는가? 병은 스스로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곧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일체 경계에 끌려 다닌다. 수만 가지 경계에 자신을 빼앗겨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능히 생각 생각에 찾아 헤매는 마음[馳求心]을 쉴 수 있다면 곧 할아버지인 부처님[祖佛]과 더불어 다름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할아버지인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그대들이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철저하지 못하고 곧 자신 밖을 향해 내달리면서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설사 밖에서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훌륭한 문자일 뿐이다. 마침내 살아있는 할아버지의 뜻은 얻지 못할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여러 선덕(禪德)들이여! 지금 이런 이치를 만나지 못하면 만겁 천생을 삼계에 윤회하여 좋아하는 경계에 이끌려 다니느라 나귀나 소의 뱃속에 태어날 것이다.
   
   도를 배우는 여러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에 의지한다면 그대들도 석가와 더불어 다름이 없다. 오늘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곳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섯 갈래(眼·耳·鼻·舌·身·意)의 신령스런 빛이 잠시도 쉰 적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다만 한평생 일 없는 사람일 뿐이다[一生無事人].
   
   대덕아! 삼계가 불안한 것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이곳은 그대들이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무상(無常)이라는 사람을 죽이는 귀신[殺鬼]이 한 찰나 사이에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늙은이, 젊은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대들이 할아버지 부처님과 다르지 않고자 한다면 다만 밖으로 구하지 말라.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청정한 빛은 그대들 집안의 법신불(法身佛)이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분별없는 빛은 그대들 집안의 보신불(報身佛)이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차별없는 빛은 그대 집안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의 몸은 그대들이 지금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다만 밖을 향해 헤매면서 찾지 않으면 이런 공용(功用)이 있다.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經論家]에 의하면 이 세 가지 불신(佛身)을 취하여 궁극의 경지를 삼으나 산승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불신이란 이름과 말이며 또한 세 가지 의지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佛身]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의하여 세운 것이고, 국토는 바탕에 의거하여 논한 것이다. 법성신 법성토는 이 빛의 그림자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덕아!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모습[一切處]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地·水·火·風]로 된 이 육신은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비·위·간·담(脾胃肝膽)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허공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그것은 그대들 눈앞에 역력하고 뚜렷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줄 안다면 곧 할아버지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느니라.
   다만 모든 시간 속에 전혀 간격이 없어서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다 그것이지만, 그러나 감정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바탕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에 윤회하여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만약 산승의 견해로 본다면 깊고 깊은 경지가 아닌 것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마음의 작용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에 있을 때는 보고,
   귀에 있을 때는 들으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고,
   밭에 있을 때는 걸어 다닌다.
   본래 이 하나의 정밀하고 밝은 것[一精明. 一心]이 나누어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부분과 화합하였을 뿐이다. 한 마음마저 없는 줄 알면 어디서든지 해탈이다.
   산승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일체 치구심(一切馳求心)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동작과 언어와 가리키는 것들[機境]을 숭상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를 취할 것 같으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자리에서 끊는다. 십지보살[十地滿心]은 마치 식객과 같다. 등각·묘각은 죄인으로서 칼을 쓰고 족쇄를 찬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과 같다.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다.
   어째서 이러한가? 다만 도를 배우는 이들이 3 아승지겁이 공(空)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道人)이라면 마침내 이와 같지 않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구업(舊業)을 녹인다. 자유롭게 옷을 입고 가게 되면 가고 앉게 되면 앉아서 한 생각도 불과(佛果)를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의 큰 징조가 된다.’고 하였다.
   
   대덕아! 시간을 아껴야 하거늘, 다만 옆길로만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선(禪)을 배우고 도(道)를 배운다고 하는구나. 이름과 글귀를 잘못 알고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는구나. 선지식을 찾아가서 생각으로만 헤아리는구나. 그렇게 잘못 알지 말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다만 일개 부모(根本)가 있다.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그대들 스스로 돌이켜 보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구하는 마음이 쉰 그 순간에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대덕들이여! 평상 생활 그대로이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양을 짓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문득 귀신을 보고 도깨비를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것이 좋으니, 비 오는 것이 좋으니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남녀들에게 일종의 여우와 도깨비의 정령이 붙어 있다. 마치 멀쩡한 눈을 비벼서 괴상망측하게 허공에서 헛꽃을 보는 일과 같이 되었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것들아. 밥값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2. 사조용(四照用)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먼저 지혜로 비춰보고, 뒤에 작용을 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나중에 비춰 본다.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도 있다.
   
   먼저 지혜로 비추고 뒤에 작용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데 해당된다.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비춰 보는 것은 법[대상]이 있는데 해당된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인 경우에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처럼,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 곳에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이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는, 물음이 있으면 답이 있고 손님[객관]도 세우고 주인[주관]도 세운다.
   
   물에 합하고 진흙에 합하여 근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제접한다. 만약 뛰어난 사람[過量人]이라면 법을 거량하기 전에 떨치고 일어나 곧 가버린다. 그래야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3. 일이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해서 천하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도깨비 귀신에게 홀리지 않는 것이다.
   일이 없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조작하지 말라. 오직 평상의 생활 그대로 하라. 그대들이 밖을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매면서 방법[脚手]을 찾아봐야 그르칠 뿐이다. 단지 부처를 구하려 하나 부처란 이름이며 글귀일 뿐이다.
   그대들은 바깥을 향해서 허둥대고 찾으려 하는 그 사람을 아는가? 시방 삼세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지금 여기에 참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또한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법을 얻어야 끝낼 수 있다. 법을 얻지 못하면 여전히 지옥·아귀·축생·천도·아수라[혹 인도]의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하게 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관통하고 있어서 눈앞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서 다만 명칭을 오인하고 글귀를 오인해서 문자 속에서 구하고 있다. 불법을 생각으로 헤아려 이해하려고 하니 하늘과 땅의 차이로 멀리 달라져 버렸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설법은 무슨 법을 설하는가.
   심지법(心地法)을 설한다. 그래서 범부에게도 들어가고 성인에게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진제(眞諦)에도 들어가고 속제(俗諦)에도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의 진(眞)·속(俗)·범(凡)·성(聖)이 아니면서 모든 진·속·범·성으로 더불어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나 진·속·범·성이 이 사람[참사람,心]에게 그런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막 ‘스님께 묻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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