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기(塔記)
간단한 행장

   선사의 휘는 의현이고 조주 남화 사람이다. 속성은 형씨다. 어려서는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자라서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마침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강원에 계시면서 계율을 깊이 연구하시고 경과 론을 널리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세상을 구제하는 약의 처방전일 뿐, 교외별전의 뜻이 아니다.”하며 탄식하고는 곧 옷을 갈아입고 제방을 행각하였다.
   맨 먼저 황벽 스님을 찾아뵙고 다음으로 대우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 기연과 말씀들은 행록에 실려 있다. 이미 황벽 스님의 인가를 받고 하북으로 가서 진주성 동남쪽 호타하라는 강 곁에 있는 작은 절에 머무셨다. <임제>라는 이름은 그 지역의 이름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때 보화 스님이 그 곳에 먼저 와서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하며 대중에 섞여 살았는데 성인인지 범부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께서 그 곳에 가시자마자 보좌해 드리다가 정작 스님께서 교화를 왕성하게 펴실 즈음에 온 몸 그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작은 석가모니라는 앙산스님의 예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 때 마침 난리가 나서 그 곳을 떠나셨다. 태위인 묵군화가 성안에 있는 자기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역시 ‘임제’라는 액호를 달고 스님을 맞아 계시도록 하였다.
   뒤에 옷깃을 떨치고 남쪽으로 향하여 하북부에 이르렀다. 부주인 왕상시가 제자의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거기에 머무신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대명부의 흥화사로 옮겨 동당에 기거하였다.
   스님은 병이 없으셨는데 하루는 옷을 여미고 자리에 앉으시더니 삼성 스님과 문답을 마치시고 조용히 돌아가셨다. 때는 당나라 함통 8년 정해(867) 정월 10일이었다. 문인들이 스님의 전신을 대명부 서북쪽에 탑을 세워 모셨다.
   시호는 혜조 선사, 탑호는 징령이라 하였다. 합장하고 머리 숙여 스님의 행장을 간단히 쓰노라.
   
   법제자 진주 보수사 주지 연소는 삼가 쓰고,
   법제자 대명부 흥화사 주지 존장이 교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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