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혜체일(定慧滯一)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먼저 혜와 정이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어서 둘이 아니니, 곧 정은 혜의 몸[體]이요 혜는 정의 작용[用]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 속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 속에 있나니, 이 뜻은 곧 정과 혜가 함께 함이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第一勿迷言定慧別 定慧體一不二 卽定
是慧體  卽惠是定用 卽惠之是 定在惠卽定之時 惠在定 此義  
卽是<定>慧等-敦 二九三

   나의 이 법문은 정, 혜로써 근본을 삼나니, 정, 혜가 서로 다르다고 그릇 말하지 말라. 정과 혜가 한 몸이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정의 작용이니라. 곧 혜의 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의 때에 혜가 정에 있나니, 만약 이 뜻을 알면 정과 혜가 함께 배움이니라.

我此法門 以定慧爲本 勿迷言定慧別 定慧一切不二 定是慧體
慧是定用 卽慧之時 定在慧 卽定之是 慧在(65)定 若識此義
定慧等學-大.興.德.宗 二九三(99)
  *함께 배운다[等學]함은 정혜등지(定慧等持 정과 혜를 함께 가짐) 곧 자성삼매(自性三昧)를 말함이요 수도방편(修道方便)이 아니니, <열반경> 28에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정과 혜를 함께 하기 때문에 부처의 성품을 밝게 본다[諸佛世尊은 定惠等故로 明見佛性이니라]'고 하였다.
  이렇게 제불의 자성삼매인 정과 혜를 수행점차(修行漸次 수행해 가는 차례)의 방법으로 삼는 것은 큰 착각이며 육조가 말씀하신 정, 혜의 본 뜻이 아니다.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느니라.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니 곧 두 몸이 있으나 두 갈래가 아니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如燈光 有燈卽有光 無燈卽無光 燈是光之(知)
體 光是燈之用 卽有二體 無兩般 此定慧 亦復如是-敦 二九五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빛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으나 등불이 없으면 빛이 없나니, 등불은 빛의 몸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 있으나 몸은 본래 같은 하나이니, 이 정과 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定慧 猶如何等 猶如燈光 有燈卽光 無燈卽不光 燈是光之體
光是燈之用 名雖有二 體本同一 此定慧 亦復如是-大.興.德.宗
二九五(67)
  *정, 혜를 등불과 빛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대저 정, 혜는 적조(寂照 고요함과 비침)를 말함이니, 일체 미망(迷妄)이 없어지면 자연히 진여혜광(眞如慧光)이 드러나 적조가 쌍류(雙流)하여 정혜등지가 되어 제불의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 들게 된다. 그러므로 정혜등등(定慧等等 정과 혜가 함께 하고 함께 함)의 구경불지(究竟佛智)가 아니면 정, 혜가 아니요 미망이다.
   점문(漸門)에서 '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以定治平亂想]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이것을 '정혜쌍수(定慧雙修 정, 혜를 쌍으로 닦음)'라고 하나, 이는 정혜등지인 육조의 정, 혜는 아니다.

   최상승법을 닦으면 경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물음도 없고 옴도 없나니, 정, 혜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아니하므로 삼세제불이 여기서 삼독(三毒)을 바꾸어 계정혜(戒定慧)로 삼느니라.

最上乘法 修行 定成佛 無去無住無來 是 定慧等 不染一切法
三世諸佛 從中 變三毒爲戒定慧-敦 三一三
  *정혜등등하면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나니, 이는 삼세제불의 자성삼매(自性三昧)이다.

   정, 혜가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은 법에 두 모양이 있느니라.
   定慧各別 作此見者 法有二相-敦 二九三(69)
  *정혜각별(定慧各別 정과혜가 서로 다툼)하면 법에 두 가지 모양을 둔 것으로서 정혜등등한 육조의 정혜는 아니니, 종문(宗門)에서 금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으로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린다[以定治平亂想]'하고, '혜로써 무기를 다스린다[以慧治平無記]'고 하여 정과 혜를 각각 따로 하여 점수(漸修)의 방편으로 삼으니, 이는 실로 육조의 사상을 거스른 것이다.
   그러므로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을 버리고, 오매일여가 되어도 언구(言句)를 참구(參究)하는 바른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곧 대혜(大慧)선사가 오매일여에 이르렀으나 원오( 悟)선사는 '언구를 의심치 않음이 큰 병이다[不疑言句是爲大病]'고 꾸짖으므로, 마침내 대혜선사가 대오(大悟 크게 깨침)하여 양기정전(楊岐正傳)을 계승한 것이다.
   '오매일여한 때에 점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漸到寤寐一如時에도 只要話頭心不離라]'고 한 태고(太古)선사의 유훈(遺訓)과 같이, 극히 어려운 오매일여의 깊은 경계에서도 화두를 힘써 참구해야 한다.
   만약에 오매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 한결같음), 동정일여(動靜一如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으나 한결같음)도 안 된 미망에서 화두를 버리고 정혜쌍수를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며 불조의 혜명(慧命)을 끊어 버리는 잘못된 법이니, 오직 <단경>을 스승으로 하여 가르침을 바로 계승하는 본분납승(本分衲僧)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육조가 천명한 내외명철의 단경사상이다.

   곧 마음을 혜라 하고 곧 부처가 이에 정이니, 정과 혜가 함께 하여 마음 속이 청정하니라. 이 법문을 깨침은 너의 익힌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인(因)은 본래로 남[生]이 없음이라, 쌍수(雙修 쌍으로 닦음)가 바르도다.

卽心名慧 卽佛乃定 定慧等等 意中 淸淨 悟此法門 由汝習性
因本無生 雙修是正-德.宗 三三七(72)
  *이는 나중에 추가된 <참청기연편(參請機緣編)>에 들어있다. 이 쌍수를 점수문으로 오해하는 바 있으나, 이는 본 송(頌)과 같이 마음 속[意中]이 청정하여 정혜등등한 자성무생(自性無生 자성은 남이 없음)에서 하는 말이다. 무생(無生 남이 없음)에서 쌍수(雙修 쌍으로 닦음)라 함은 적조쌍류(寂照雙流 고요함과 비침이 쌍으로 흐름)라 함과 같으니, 무생을 깨달아 마음 속이 청정하면 자연히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고[寂而常照],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여[照而常寂] 적조쌍류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혜등등이며 등지(等持 함께 지님, 삼매)라고 하는 바, 정 가운데 혜가 있고 혜 가운데 정이 있어서 정, 혜가 쌍등(雙等 쌍으로 함께 함)하므로 쌍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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