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념위종(無念爲宗)

   나의 법문은 옛부터 모두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나니, 모양 없음[無相]으로 몸[體]을 삼고 머뭄 없음[無住]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自法門 從上已來 [頓漸] 皆立無念爲(無)宗 無相爲(無)體
無住[無]爲本-敦 二九五
  *돈점(頓漸) 두 자는 군더더기임이 밝혀졌으며, 무념무종(無念無宗), 무상무체(無相無體), 무주무위본(無住無爲本)은 무념위종(無念爲宗), 무상위체(無相爲體), 무주위본(無住爲本)을 잘못 베낀 것이다.

   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 먼저 무념을 세워 종을 삼고, 모양 없음으로 몸을 삼고 머뭄 없음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我此法門 從上已來 先立無念爲宗 無相 爲體 無住 爲本-大.
興.德.宗 二九五(54)
  *육조의 무념은 망상이 다 없어진 불지무념(佛地無念 부처님 지위의 무념)이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是以 立無念爲宗-敦 二九六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所以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六

   이 가르침의 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敎門 立無念爲宗-敦 二九七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此法門 立無念爲宗-大.興.德.宗 二九七(55)
  *육조가 무념위종(無念爲宗 무념으로 종을 삼음)을 거듭 말씀하신 것은 육조의 근본 입장이 내외명철한 묘각무념(妙覺無念)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이 견해를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만약 유념(有念 생각 있음)이 없으면 무념도 또한 서지 못하느니라. 없다[無]함은 무슨 일이 없다 함이며, 생각함이란 무슨 물건을 생각함인가? 없다 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모든 진로(塵勞 번뇌)를 버림이요, 진여는 생각[念]의 몸[體]이며 생각은 진여의 씀[用]이니라.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見聞覺知],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아니 하고 항상 자재하나니, <유마경>에 이르기를 '밖으로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나 안으로 첫째 뜻[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느니라.

世人 離見 不起於念 若無有念 無念 亦不立 無者 無何事 念
者 念何物 無者 離二相諸塵勞 眞如 念之體 念是眞如之用 性
(姓)起念 雖卽見聞覺知(之) 不染萬境(鏡)而常自(白)在 維摩經
云 外能善分別諸相 內於第一義而不動-敦 二九七(56)
  *무념은 유무(有無)나 선악(善惡)처럼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를 영원히 여읜 진여정념(眞如正念)을 말한다.

   없다 함은 상대되는 두 모양의 진로의 마음이 없음이요, 생각함이라 함은 진여본성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생각의 몸이요 생각은 진여의 씀이니라, (삭제 부분)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 여섯 모양을 생각하여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아나 만 가지 경계에 물들지 않아 참된 성품이 항상 자재하며 밖으로는 비록 모든 물질과 모양[色相]을 분별하나 안으로는 첫째 뜻에서 움직이지 않느니라.

無者 無二相諸塵勞之心 念者 念眞如本性 眞如 卽是念之體
念 卽是眞如之用 (削除部分)眞如自性 起念 念六相 雖有見聞
覺知 不染萬境而眞性 常自在 外能分別諸色相 內於第一義而
不動-大.興.德.宗 二九七(57)
  *이 항은 돈황본과 약간 표현이 다르기는 하나, 진로를 영원히 떠난 진여정념(眞如正念)의 근본 사상은 같다. 중간에 보조(普照)가 발문(跋文)에서 지적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는 부분(眞如自性起念 非眼耳鼻舌能念 眞如有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色 聲當時卽壞-삭제부분) 은 삭제하였는데, 돈황 고본에는 이 부분이 처음부터 없으므로 돈황본의 뛰어남을 알 수 있으며, 삭제 부분은 이 항의 본 뜻인 '진여정념(眞如正念)'을 설명해 보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니 기억과 집착이 없는지라, 광망(?妄)을 일으키지 말라. 곧 스스로 진여의 성품이니라.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着 莫起(去)?妄 卽自是眞如性(姓)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敦 三一三
(59)
  *법을 깨달으면 곧 무념이요,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이라,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망념도 없어서 광망(?妄)을 일으키지 않고 자기의 진여의 성품을 써서 지혜로써 관조하여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성품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悟此法者 卽是無念 無憶無著無妄 莫起?妄 用自眞如性 以智
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是見性成佛道-大.興.德.宗 三一
  *이 항 또한 돈황본과 표현이 약간 다르기는 하나 큰 뜻은 같다. 법을 깨달으면[悟法] 무념이요 견성성불임을 말하여 준다.

   무념이란 모든 법을 보되 모든 법에 물들거나 매달리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모든 곳에 끄달리지 않느니라.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敦 三一八(60)

   만약 모든 법을 보되 마음이 물들어 끄달리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니라.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名無念-大.興.德.宗 三一八

   모든 경계 위에서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 이름하느니라.
   於一切境(鏡)上 不染 名爲無念-敦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서 일만 가지 경계를 만나서도 마음이 늘 고요하여 생각 위에 모든 경계를 떠나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을 삼느니라.
於諸境上 心若能萬境 常寂 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所
以 立無念爲宗-大 二九六(61)

   모든 경계 위에서 마음이 물들지 않음이 무념이라, 자기의 생각 위에 항상 모든 경계를 떠나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느니라.
於諸境上 心不染曰無念 於自念上 常離諸境 不於境上 生心-
興.德.宗 二九六
  *모든 경계 위에 마음이 나지 않고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무념이라고 하는 바, 식심견성한 불지무념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이니, 불오염(不汚染 물듦이 없음)은 곧 구경무념(究竟無念)을 말한다.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법에 두루 통달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면, 무념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悟無念法者 萬法 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敦.大.興.德.宗 三一八(62)
  *이는 옛 조사들이 특히 많이 인용하는 구절로, 육조는 무념이 곧 만법진통(萬法盡通 만법이 다 통함), 제불경계(諸佛境界 모든 부처님의 경계), 불지위(佛地位)이므로, 식심견성하면 내외명철, 불지무념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법문은 언제나 한결같아 터럭만큼도 어김이 없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이 철칙(鐵則)을 저버려서는 안 되며, 만약 어긋난다면 육조의 법손이 아니다.
  이로써 <단경>의 대강을 알았다. <단경>의 목표는 식심견성이며 식심견성은 묘각인 내외명철이므로, 이를 반야삼매, 해탈, 무념이라고 한다.
  이는 점차(漸次)를 밟아 닦아가지 아니하고 당장 성불해 마친다[直了成佛]고 하는 돈수이므로, 육조는 늘 유전돈법을 고창(高唱)한 것이다. 돈법이므로 무념으로 종을 삼아서 모든 망념이 사라졌으니, 제불의 경계인 불지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견성이 곧 성불임을 청천백일과 같이 선설(宣設)하였으며, 깨달은 뒤에는 부처님 행을 수행[修行佛行]하였으니, 이 법을 잇는 법손들은 육조의 성의(聖意)를 바르게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돈오견성하고 차제점수(次第漸修 차례로 차츰차츰 닦음)하여 구경성불(究竟成佛)한다'는 하택(荷澤), 규봉(圭峯)의 점수사상은 교가(敎家)의 전통이요 육조의 사상을 바로 전한 것이 아닌 지해(知解)라고 옛 조사들이 극력 배제한 것이니, 육조의 후손인 우리는 <단경>을 숙독(熟讀)하고 실천하여 삿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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