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은 왜 오셨습니까?
▶부처님은 무한한 세월 전에 도를 이루어서 뚜렷한 안목을 갖춘 분인데, 사바세계에 성숙한 출세의 인연이 도래한 고로, 출세의 인연-진리를 세상에 유포하는 그러한 인연이 도래한 고로 2500년 전에 나오셨지요. 부처님의 깨달은 그 진리의 세계는 만(萬) 사람이 뚜렷이 진리의 눈이 열리면 몸을 천번 만번 받되 지구가 변하더라 해도 뚜렷한 밝은 지혜는 변천이 없습니다. 항시 밝아 있습니다. 그러한 밝은 지혜를 갖추어 가지고 관찰하니, 나만이 위대한 진리의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이 다 나와 같은 밝은 지혜의 눈이 심성(心性) 가운데 갖춰져 있건만 알지 못하는 고로 쓰지를 못한다. 그래서 사바세계에 나온 겁니다. 그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 큰스님께서는 본인 스스로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많지요. 일일 법문이 다 그렇습니다. 천불(千佛) 만조사(萬祖師)는 천 부처님이나 일체 도인들이 깨달은 과정은 똑같습니다. 뭘 깨달았느냐 하면, 자기의 심성을 바로 보면 곧 부처를 이룬다. 진리를 이룬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진리의 자체가 심성 가운데 다 갖춰져 있는데, 눈을 바로 떠서 심성을 바로 보면 거기 깨달은 경계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가령 비유를 하건대는, 진리의 고향은 서울 경기도 복판에 있는데, 아는 자가 아니면 거기에 이르게 못하고, 이른 자가 아니면 서울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목구비가 분명히 갖춘 이는 천사람 만사람이 남산의 봉우리에 올라가면 사방 서울 경기 다 한 눈에 보이듯이 똑같습니다. 진리의 눈이 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장부(彼丈夫) 아장부(我丈夫)다,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가 되는 거요. 너도 도인이요, 나도 부처가 된다 그 말입니다.
서울 장안을 한 눈으로 다 보거든. 그러면 진리의 고향에 이른 겁니다.
그러면 스승 없이 깨달은 이, ‘알았다’ 하는 이는 어떠냐? 육로도 개척이 안됐고, 교통편도 개척이 안 됐고, 깜깜한 밤중에 부산이라는 도시가 생기기 전 갯벌가에서 ‘서울 진리의 고향을 찾아가야 되겠다’ 생각을 먹고 혼자서 온데로 깜깜한 밤중에 헤맵니다. 도로 길이 있어야 진리의 서울을 찾아가고 차나 비행기가 있어야 찾아가지. 길도 없고 육로도 없고 비행기도 없는데 그렇게 헤매다가 보면 일생뿐만 아니라 몇 생이 다 가버립니다.
   그러면 이 진리의 도는 눈밝은 선지식(善知識: 道를 깨친 이)을 만나는데 몇 생을 건너뛰고 금생에 다 이룰 수 있는 여건을 갖춥니다. 그래서 그 지도를 바로 받아서 생활 속에 도를 바르게 닦고 닦아 연마하다 보면 어느 정도 지견(知見: 진리에 대한 견해)이 열립니다. 열리면 깜깜한 밤중에 저 대구쯤 이르러가지고 전기불이 번쩍번쩍하니까 ‘여기가 진리의 고향이구나!’ 해서 거기서 안주하는, 머무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또 혹시 스승 없이 하는 이들은 깜깜한 밤중에 진리의 고향 서울을 찾아가다 보면 대전쯤 이르러 가지고 보니까 큰 광야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 여기가 진리의 고향이구나!’ 해서 거기서 안주하는 수가 허다합니다. 서울의 진리의 고향은 따로 있는데, 엉뚱한 데 가서 안주해가지고 ‘알았다’ 하고 ‘내가 진리의 고향에 다 왔다’ 해가지고 전(廛)을 벌려가지고 만사람을 그릇 지도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 법칙을 세워 놓기를,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다 천마외도(天魔外道)다.” 다 마구니 소견(所見)이다 그 말입니다.
   왜 그렇느냐? 진리의 고향에 이르지도 못하고 ‘진리의 고향에 이르렀다’ 해가지고 만사람을 그릇 지도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러니 아니다 그 말입니다.

- 그런데 큰스님, 진리의 고향에 이르면 뭐가 달라집니까?
▶생활이 진리의 낙에 그대로 일상생활화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위 ‘깨달았다’ 하는데, 깨달으면 뭐가 달라져야 되는 거 아닙니까? 뭐가 달라집니까?
▶하하하. 세상 사람들이 희유한 것을 구하지요. 별것이 있는가 하지만, 진리의 자체는 별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느냐? 뭐 때문에 별것이 없느냐? 인아상(人我相: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생각)이 다 없거든. 너니, 내니, 아만, 교만, 시기, 질투, 갈등, 미워하고, 고와하는 이러한 중생의 용심(用心)은 싸악 없고, 평등한 용심, 활발발(活??)한 용심, 고하(高下)가 없는 용심, 세계가 한 집이 된 용심, 모든 인류가 나로 더불어 둘이 아닌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도(道)의, 진리의 세계입니다.

- 저희같이 속세에 있는 사람들이, 큰스님께서 워낙 높이 계시니까,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데요, 좀 쉽게, 예를 들어 깨닫게 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깨닫게 되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할 것 같으면, 일상생활이 그대로 진리의 도입니다. 일상생활이 그대로 진리다. 그러면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가지가지의 자연과 더불어 둘이 아닌, 그러한 때묻지 않는 생활이 그대로 생활화가 됩니다.
   그러면 중생계는 어떠냐?
   ‘나’라는 허세, 시기, 질투, 속이고, 미워하고, 공포, 불안 이러한데 찌들어가지고 정신없이 생을 살다가 죽는 게 중생이거든. 그러면 이러한 중생의 악습이 싸악 없어지고 편안한 자연과-자연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낙을 같이 누립니다.

- 우리 일반 세속 속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도 해야 되고, 고민도 해야 되고, 처자식도 먹여 살려야 되고 하는 그땐 세상에 찌들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예. 찌들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거기에 진리의 낙을 얻은 이는 세상에 살아도 때묻지 아니하는, 공포ㆍ불안ㆍ갈등이 없는 그 용심을 하며 삽니다. 이 도를 알면.
그래서 내 아까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온 세계가 한 집이요, 온 인류가 나로 더불어 둘이 아닌데 거기에 무슨 갈등이 있겠습니까? 서로 상부상조해서 대자대비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항시 나누면서 즐기면서 사는 것이 진리의 도입니다.

- 깨달은 분들은 늘 삶 자체가 즐거운 겁니까?
▶그렇지요. 그대로 진리니까. 세상 사람은 시기, 질투, 아만, 온갖 그런데 찌들지만 {깨달으면} 그대로 소화를 시켜버리거든. 소화를 시키니까 때가 안 묻지요. 그러니 종일 말을 해도 말한 바가 없고, 종일 걸어도 걸은 바가 없는 그러한 용심을 합니다.

- 큰스님, 제가 대구 출신입니다. 출생하기는 경주에서 났고요. 제 나이가 속세 나이로 50입니다. 그런데 큰스님 말씀하시는 것을 저는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하하. 경상도 사투리가 많아서.

- 큰스님께서는 어떤 욕망에 휩싸인 적이 없었습니까?
▶나는 스무 살에 절에 들어왔습니다. 스무 살에 동네 가까이 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초대(初代) 조계종 종정(宗正)을 지냈던 석우(石友) 선사-그때는 종정이 아니셨지요-라고 십리 밖에서 도인이 와서 계신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아주 인품이 대단했지요. 그래서 오촌 당숙이 그 절을 다니셨는데, 정월 불공을 드리러 가거든요. “너도 도인 스님 친견 할 겸 불공드리러 같이 가자.” 해서 그 당시 쌀 한마지기를 짊어지고 십리를 걸어 따라갔어요.

- 그때는 뭐 하셨습니까? 농사 지으셨습니까?
▶예. 농사지었지요. 부모님을 모시고.

- 학교는 안 다니시고요?
▶환경이 넉넉지 못해서 농사를 거들며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가서 인사를 하니까 하시는 말씀이,
   “그대가 이 세상에 안 나온 셈 치고 도를 한번 닦아보는 게 어떻겠는가?”
   “도를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랬거든.

- 우리가 보통 속세인들이 묻는 질문 아니겠습니까?
▶“도를 닦으면 어떻게 됩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네.”
   그래서 그 말에 아주 감화가 되었지요.
   “그러면 부모님이 계시니 가서 한번 상의를 해 보고 결정을 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고는 스님네의 생활을 관찰을 해봤지요. 아들ㆍ딸 가족이 있는 게 아니고 순수한 중놀이{중노릇}를 하는 그 가운데 일상생활을 꾸려가거든. 밥하고, 나무 해오고, 채소 가꾸고, 독신으로서 이렇게 자기 생활을 하는 것이 세상에 없는 법이라. 앉아서 참선하고 밥먹고.
   그래서 거기서 전생 인연이었던지 아주 끌리더구만.
   ‘이런 생활도 있구나!’
   그래서 집에 가서
   “절에 다녀왔습니다. 도인 스님이 저보고 위대한 부처되는 법이 있는데 중놀이를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 하는데 중놀이를 해도 되겠습니까?”
하니
   “그래. 한번 해 봐라.”
   그러시는 게야. 형제가 7남매거든. 촌(村)에는 도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숭배를 하거든요.
   그래서 “하라” 하니까 행장을 챙겨서 가서 행자생활을 시작했지요. 4월 보름에 여름 결제를 들어가서 7월 보름까지 석달 간 안거를 해서 참선을 마치니까, 바랑을 짊어지고 선지식 스님을 친견하러 다니는 게 절집의 가풍이거든.
수좌들이 해제가 되니까 바랑을 짊어지고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다 오니까,
   “너희들 석 달간 공부를 잘 했는지 밥값을 추심(推尋)해야 되겠다. 여기 다 앉아라. 행자 너도 앉아라.”
   그래서 7, 8명이 마루에 둘러앉았습니다.
   “옛날 삼한(三漢) 시절에 과거 보던 그러한 유래가 있는데, 그 당시에 운자(韻字)를 놓아가지고 운자 한 자를 잘 놓음으로 해서 재상에 등용한 유래의 역사가 있네. 일출동산대소(日出東山大笑), 해가 동쪽 산에 떠서 크게 웃는 모습이 어떻더라. 하는 글자에 운자를 한번 놓아보게. 그 운자가 났다는 거라. 그 당시에 ‘나 아(我)’ 자(字)를 놓은 이가 있었는데, 그 이가 재상에 등용이 되었네. ‘동쪽 하늘에 해가 떠서 온 천지를 밝히는 것이 나다’ 하는 뜻이지. 그래서 재상에 등용이 되었는데, 자네들이 글자를 한번 놓아 보게.”
   그러니까 근 10년 된 선객들이 벙어리가 되어 있어요. 한마디 하라니까. 하하하.    내 차례가 오니까
   “행자 네가 그럼 한마디 해봐라.” 그러시길래
   “저는 ‘없을 무(無)’ 자를 놓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거든.
   “해가 동쪽 하늘에 떠서 온 천지를 비추지만 호리(毫釐)도 ‘나’라는 상(相)이 없습니다.”
   라는 뜻에서 운자를 놓았거든.
   그래서 거기서 장차 도인이 된다고 해서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총애도 받고.
그렇게 행자 놀이를 하다가 음력 10월 달에 해인사 산중에서 석우 선사를 조실로 모셔서 선사를 따라서 해인사에 가서 행자로 시봉을 하다가 그 이듬해에 거기서 중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지금까지 생활을 하시면서 어떤 욕망을 느껴본 일이 없으십니까?
▶중생은 물론 습기(習氣)가 있지만, 도(道)라는 데, 전생의 인연 때문인지, 매료가 되었거든요. 도인이 된다는 것, 도를 닦아서 바로 일념삼매(一念三昧)만 되면 도인이 된다는 거기에 매료가 되어서 중만 되면 참선을 해서 도를 뚫어내야 되겠다, 알아야 되겠다. 거기에 심취가 되어가지고 중놀이를 했습니다.

- 그런데 큰스님께서 깨달으신 게 ‘불이(不二)’하고 ‘만물과 하나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그건 옅은 진리지요. 진리도, ‘온 천지 형형색색(形形色色),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대로 청정(淸淨)의 진리다.’ 하는 그런 진리가 하나 있고.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삼라만상 온 천지 법계가 다 공(空)해서 한 티끌도 없다.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다.’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는데 천당, 지옥이 있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 게 하나 있고.
   또 그 한 계단 위에는 ‘향상(向上)의 일구(一句)’라고 해서, 향상의 일구의 진리는 모든 부처님이 깨친 심오한 진리인데, 거기에 이른 자만이 서로 인증(印證)을 해주고 제자로 봉합니다. 거기에 이르러야 견성(見性)해서 참으로 진리의 도를 깨달았다 하며 인증서를 줍니다.
   그렇게 되어야 만 사람의 눈을 안 멀게 합니다. 바른 진리의 문에 이르게 해서 모든 진리의 세계에 진리의 전(廛)을 주고, 받고, 펴고, 거두고 마음대로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안 됩니다.

- 저도 글을 쓴지 한 20여 년이 됩니다만, 통상 기사를 쓸 때, 그 기사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기사를 쓰면 기사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렵게 쓰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고 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우리 보통 중생들이 높으신 스님들의 법어나 말씀을 듣고 나면 알듯 말듯 알쏭달쏭하거든요.
▶알쏭달쏭하지요. 진리의 세계니까. 진리의 세계니까 알쏭달쏭한 게 정상입니다.

- 대부분 중생들은 실제로 면전에서는 ‘예’ 이래도 돌아서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진리라는 게 어떤 것이라는 걸 중생들이 좀 더 알기 쉽게 가르쳐 주셔야 될 의무가 있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내가 방금 세 단계를 말했거든요. 온 삼천대천세계 형형색색이 청청(淸淨)의 한 티끌도 없는 청정의 깨끗하고 깨끗한 세계의 바다를 이루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온 대천세계가 형상이 있는 게 아니라 텅텅 비고 비어서 거기는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고, 하늘세계도 없고, 지옥도 없다. 그게 있고. 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향상의 진리의 세계는 범성(凡聖)이 용납이 안 되고, 도저히 거기는 돌불[石火:부싯돌]보다도 빠르고 번갯불보다도 빠른 그러한 기봉(機鋒)을 갖춘 자만이 그러한 세계에 살림살이를 주고 받고 하지, 그러한 기봉을 갖추지 못하면 도저히 태산이 가려서 안 됩니다. 모든 부처님의 바른 진리를 깨달아서 법을 전한 그 과정은 향상의 일구의 진리의 세계입니다. 거기에 이르러야 구경(究境)의 진리에 이르렀고 만 사람의 눈을 안 멀게 하고 바른 지도를 할 수 있다 하는 것이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내려오는 법칙입니다.

- 그러면 저희가 그런 단계를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어떻게 바뀝니까?
▶그것은 아는 스승으로부터 점검을 받아야 됩니다. 바로 알았는지. 가령 서울이 향상의 일구 넓은 진리의 세계인데, 대전이나 대구에 이르러 안주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은 스승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 그 단계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최고의 단계에 가서는 크게 쉬는 땅을 얻어서 억만 년이 다하도록 진리의 고요한 적멸(寂滅)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고요하고 적멸의 적적한 낙을 누린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한 적멸의 낙에 편안히 안주하게 된다. 그것은 이해가 안 되지. 이해가 안 되고. 그래서 공자(孔子)의 제자가 물었거든요.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성인이 누굽니까?”
   “석가모니니라. 석가모니는 말하기 전에, 법을 설하기 전에 만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다스리기 전에 스스로 다 다스려 버린다. 그러한 덕화를 가졌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다 말을 하고, 교육을 하고, 때리고, 나무라고 해야 질서가 서서히 잡히고 하지. 그것은 그러한 복덕과 지혜를 갖춘 자만이 고개가 숙여지고 모든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일거일동에 법문을 듣기 전에 감화를 다 입어서 따른다는 것이거든. 그래서 공자도 그렇게 석가모니 부처님을 칭찬을 하셨습니다.

- 그러면 큰스님께서 앞부분에 말씀하신,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고 그에 따라 같이 간다고 하는 거. 단순히 그것을 알기 위해서 출가를 하고 그렇게 공들여서 닦아야 그걸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이것은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집니다. 왜 그러냐? 이 중생이라는 것이 지구가 생긴 이후로 형형색색이 다 이루어졌는데,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이 사대(四大)는 네 가지 요소가 인연이 되어 몸뚱이가 형성이 되었다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할 때 주인공이 딱 나가버리면 삼일 이내에 썩어서 냄새나니까 화장하고 묻어버리거든요.
   그러면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본고향으로 돌아가 버린다.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가고, 대소변은 물로 돌아가고, 호흡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이 네 가지 요소가  본 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주인공의 자체는, 참나의 주인공의 자체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우주가 멸한 후에도 항시 여여하게 있습니다. 변함이 없이. 그 자체를 바로 보아야 진리의 도가 그 가운데 다 있습니다.

- 지금 진리의 도라는 것은 ‘참나’를 보는 것이다 그 말입니까?
▶예, 바로 그겁니다. ‘참나’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절집에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하는데, 바른 참선 수행법입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몸뚱이는 썩어 없어지니까 ‘참나’가 아니다. 이 몸 부모에게 받기 전 어떤 것이 ‘참나’냐? 석가모니 부처님도 참나를 아셔가지고 위대한 진리의 스승이 되었고, 모든 도인 스님네도 참나를 알아가지고 도인이 되었거든요. 모든 세상 사람들도 바른 지도를 받아서 생활 속에 참선을 해서 일념(一念)이 지속되는 과정만 오면 그만 도가 열려버립니다. 일념이라는 것은, 우리가 밥을 지으나, 빨래를 하나, 농사를 지으나, 산책을 하나, 직장생활을 하나, 밤낮으로 쭈욱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루에 천번 만번 의심을 밀어줍니다. ‘어떤 것이 참나던고?’ 참나를 찾는데 있어서 화두가 달아난다고 해서 용을 써서 힘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상기(上氣)가 올라 머리가 무거워 참선을 못합니다. 생각으로만 간절히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밥 먹으면서도 참나를 찾고, 일하면서 참나를 찾고, 목욕하면서도 참나를 찾고, 산책하면서도 참나를 찾고, 자는 가운데도 참나를 찾고, 이렇게 무르익어지면 어떻게 되냐 할 것 같으면, 참의심이 시동이 걸려가지고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밤낮으로 흘러갑니다. 밤낮으로 흘러갈 때는 잠깐 앉아 있는데 며칠이 지나갑니다. 이러한 무르익은 상태가 오면 사물을 봐도 보는 감각이 없고, 소리를 들어도 들은 감각이 없고 화두일념(話頭一念)에 푹 빠져서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에 참구하는 화두가 박살이 납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거기서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 어리석은 질문입니다만, 참나를 찾아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사람이 빈한하게 삶은 지혜가 짧아 그렇다.[人貧智短] 지혜가 없어 그렇다 그 말입니다.
   말이 여의면 털이 길다.[馬瘦毛長] 여읜 말은 항시 털이 길거든. 틀림없는 거짓말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온 국민이, 온 세상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 생활을 전폐(全廢)하고 하라는 게 아닙니다.

- 아니 제 말씀은, 참나를 찾아야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평강을 누리고 안락을 누리기 위해서. 세상 사람은 왜 자살도 하고, 고통 가운데 근심ㆍ걱정ㆍ공포ㆍ불안에 쩔어가지고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천하 명문 대학을 나오고, 천하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을 지내도 마음의 고뇌는, 괴로움은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도를 닦음으로 인해서, 참나를 앎으로 인해서 봄바람에 눈 녹듯이 싸악 번뇌 갈등이 녹아져 없어집니다.

- 참나를 찾게 되면 마음에 어떤 평안을 얻는다 그 뜻입니까?
▶그렇지요. 마음이 평안해서 태평해지고 모든 갈등이 싸악 없어집니다. 봄바람에 눈 녹듯이 싸악 없어집니다. 중생의 습기(習氣)가. 습기가 무엇이냐 하면, ‘나’라는 허세, 많이 가지려는 욕심, 미워하는 마음, 공포심, 불안심, 갈등, 가지가지 중생의 악조건이 천지거든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생겼느냐?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공포 불안. 만족이 안 되니까. 그 어리석은 마음에서 온갖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이루려고 하니,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니 돈도 많이 들고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만 ‘에잇! 죽자.’ 해가지고 자살을 하거든. 도를 이루면 모든 세상이 나로 더불어 한 집이요, 나로 더불어 한 몸인데, 내가 더 가질 필요가 없단 말이여. 다 같이 한 몸뚱이인데.
그러한 평화로운 낙을 누리는 겁니다.

- 저... 큰스님의 ‘참나’는 무엇입니까?
▶하하하. 자, 차 한 잔 들어보세요.

- 저의 ‘참나’는 이겁니다.
▶하하하. 차 맛을 잘 아세요!

-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참나는 육안으로는 보지를 못합니다. 심안(心眼)이, 마음의 눈이 열려야 참나를 보게 됩니다. 이 육안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심안이 열리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이 설한 심오한 무진(無盡) 법문이 다 있습니다. 그것이 다 내 살림이 돼버립니다. 차이가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쾌활 명랑하게 사는 것이 진리의 도입니다. 석가모니 살림살이가 내 살림이 되고 모든 도인들의 살림살이가, 내가 진리의 눈이 열리면, 그게 내 살림이 돼버립니다. 장벽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진리의 법문을 물어도 석화전광으로 척척 답이 나와서 그러한 눈을 갖춰야사 대장부 활개를 친다, 걸림이 없는 생활을 한다, 평화로운 생활을 한다, 안락한 생활을 한다 그 말입니다.

- 저, 큰스님. 제가 미혹한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만, ‘참나’의 정체가 뭡니까? 저의 ‘참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참나의 정체? 하하하. 해운대 앞바다 물을 한 입에 마셔 다해 올 것 같으면 그대를 향해 일러주리라.

- 그런데 저도, 쉽게 말하면, 속세에서 많이 살았지 않습니까? 배울 거 배우고 읽을 거 읽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현재의 존재 자체가, 육신이 없어지면 저 자신도 소멸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참나’를 모르는 소립니다. 참나는 허공과 같이 텅 비어가지고 그 가운데 밝은 것이 가득해 있고, 밝은 가운데 캄캄한 것이 가득해 있고. 항시 둘이 서로 상주(常住)해 있습니다. 그러한 눈을 갖춰야사 탕탕무애(蕩蕩無碍)의 안락을 누리게 됩니다.

- 스님께서는 도를 깨치고 난 뒤로는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친다든가 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뭐라 할 때는 물론 뭐라 하지. 잘못된 것은 뭐라 하지만, 뭐라 하는 것이 뭐라 하는 게 아니요, 성을 내는 것이 성내는 것이 아니요, 꾸짖는 것이 꾸짖는 게 아니다 그 말입니다.
   내가 스물여섯 살 때 한국 선의 주류의 선맥을 이으신 월내 묘관음사의 향곡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왜 그리 찾아갔냐 하면, 스물네 살 때 초대 종정 스님이 입적을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선산 도리사에서 정진하고 있다가 정월 보름날 해제가 되면 공부한 것을 점검을 받아야 되겠다. 소견이 하나 나가지고. 그러고 있는 차제에 그만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날아왔어. 그래서 가서 화장을 다 마치고는 7일 종단장(宗團葬)을 했습니다. 그 걸음으로 팔공산 파계사라고, 성철 선사가 10년간 주석한 암자가 있습니다.
   그 당시 성철 선사, 향곡 선사 두 분이 쌍벽을 이뤄가지고 한국 선종의 제일 주류의 안목을 갖춘 위대한 선사입니다. 두 분이 동갑이면서 일생 절친한 도반이고, 두 분은 서로서로 깨달은 힘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먼저 가니까, “스님, 제가 공부하다 이렇게 왔는데, 바른 소견이 났는지 대자비(大慈悲)로 점검을 부탁합니다.”    “나는 몰라, 나는 몰라.” 그때는 그렇게 할 때거든요. 다른 데로 찾아가라고. 사람을 접대 안 할 때거든.
   그래서 접대를 안 하려고 하니, 할 수 없이 그 걸음으로 월내 묘관음사로 갔어요. 향곡 선사는 다릅디다.
   “제가 공부하다 이렇게 점검받으러 왔습니다.” 하니 대뜸 묻기를,
   “일러도 삼십 방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이다.”
   “진리의 답을 바른 답을 해도 삼십 방을 맞고, 바른 답을 못해도 삼십 방을 맞는다.” 대번 그러거든.
   그만 ‘알았다’는 생각이 우물쭈물한단 말이여. 그리 벼락같이 나오는데. ‘일러도 삼십 방을 맞고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을 맞는다.’ 그만 우물쭈물 하거든.
   “그것도 척 못 나오면서 뭘 알았다고 하느냐?”
   두 번째 물음을 던지시기를,
   남전(南泉) 도인은, 마조(馬祖) 도인이라고 124명의 도인이 쏟아져 나온 도인의 상수제자(上首弟子: 제일 뛰어난 제자)인데, 칠백 명 대중을 거느리고 참선 회상(會上: 대중이 모여 정진하는 도량)을 잘 하고 있는데, 그 사중(寺中)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법당을 기준으로 동편에도 큰 선방이 있고 서편에도 큰 선방이 있었는데, 사중의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동쪽 선방 스님들은 동쪽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 스님들은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하며 서로 ‘네고양이, 내고양이’ 해서 시비(是非)가 분분하니, 하루는 운집종(雲集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치는 종)을 쳐라 해놓고 대중이 모여 들었거든.
   모여드니 시자(侍者)를 보고는 법당의 법상(法床: 설법하는 상)에 조실이신 남전    도인이 앉아서
   “고양이 잡아오너라. 칼 가져오너라.” 하니까 시자가 고양이를 잡아오고 칼을 가져오니 고양이를 들고 하는 말씀이
   “동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이 고양이를 동쪽 선방 고양이라 하고, 서쪽 선방에서 참선하는 스님네는 이 고양이를 서쪽 선방 고양이라 하니, 금일 이 고양이에 대해서 분명히 한 마디를 이르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고양이를 살려두거니와 바로 이르지 못할 것 같으면 두 동강을 내리라.”
하시고는
   “일러라.” “일러라.” “일러라.”
   세 번을 말해도 칠백 명 대중이 ‘네고양이, 내고양이’ 시비(是非)만 했지 남전 도인의 이르라는 심정을 꿰뚫어 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어요. 약속과 같이 바로 이르지 못하면 두 동강이 낸다, 죽인다 했으니 한 손으로 고양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칼을 쥐고 쳐서 던져버리고 당신 방에 가서 쉬고 있으니, 당신 상수제자가 사중에 볼 일이 있어 밖에 갔다가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니,
   “오늘 오전에 대중에게 이러한 고양이 법문이 있었는데, 그대가 만약 참여했던들 뭐라고 한마디 답을 하려는고?”
   하니 바로 신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리거든.
   그러니 남전 도인이
   “그대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릴 뻔 했다.”
   그랬거든.
   “어째서 ‘이르라’ 하는데 머리에 신짝을 이고 나가느냐?” 향곡 선사가 나한테 묻거든. 거기에 또 우물쭈물하거든. 답이 척 나와야 되는데. 거기에 다 죽어버렸거든. 송장이 돼버렸거든.
   “에잇 이 사람아, 다시 공부해서 오너라.”
   하고 쫓겨났지요. 쫓겨나서 두서너 철 다른 데서 공부를 하는데, 오대산에 들어가서, 겨울에 춥더마는요, 눈이 오니까 처마까지 오더구만요. 아침에 일어나서 예불 모시러 가기 전에 어떻게 소변소를 가느냐? 거기는 희한하게도 이런 널판때기가 있어서 눈을 이리 치고 저리 치니까 길이 나더구만. 눈은 이만치 있는데. 그때 되게 춥단 말이야. 그땐 나무도 없고, 이불도 없고, 앉은 자리 좌복 하나를 잘 때는 배에 얹어 새우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칠팔 명이 지냈지요. 얼마나 춥던지 숭늉을 방의 구석에 놓으면 숭늉이 얼 정도라.

- 오대산 어느 절에 계셨습니까?
▶상원사. 그렇게 겨울을 지내다가 하루는 유달리 따뜻한 날이 있어 남쪽 마루에 앉아서 내가 이걸 가지고 참말로 견성했다고 할 수 있느냐? 허송세월을 해서 되겠느냐? 스스로 반성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말로 견성을 했으면 고인네와 같이 일일 법문에 당당하고 돌불보다도 빠르고 번갯불보다도 빠르게 바른 답이 척척 나와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이건 아니니까 왜 허송세월을 해서 되겠느냐? 스스로 자책을 했습니다.
   내가 이걸 가지고 견성이라고 하면 일생 허송세월을 하면 여기 막히고 저기 막히고 이건 아니다.
   천성 해제하면 바랑을 지고 답을 하면 언하(言下: 말이 떨어지자마자)에 ‘아니다’ 하고 방망이를 내리는 그 선지식을 찾아가야 되겠다. 그 외에 중간에 한 2년 동안 두루 제방을 ‘알았다’ 하고 선지식을 찾아가서 문답을 했지만, 향곡 선사와 같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옳다’ ‘아니다’ 칼질을 하는 이는 그 분 뿐이라. 그래서 바랑을 지고 가서
   “화두를 하나 내려주십시오. 화두를 타파하기 전까지는 바랑을 지지 않겠습니다.”
   그 때 스물여섯일 때입니다. 혈기 방장할 땐데. 이 도를 깨닫기 전에는 내가 바랑을 지지 않겠습니다. 절 산 문을 안 나가겠다. 그 말이지요. 그건 아무라도 약속 못 합니다.
   “이 어려운 진리의 도의 관문을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생사를 떼어놓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하고는 한 2년 5개월 동안 씨름을 했지요.

- 파계사에서요?
▶아니 월내 묘관음사에서. 향곡 선사 절에서.
뭘 화두를 내려줬느냐 하면. 향엄(香嚴) 선사라고 위산(?山) 도인의 도인 제자가 있었는데 그 분이 출세(出世)를 해서 법문을 하시기를,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가지를 밟지 않고 손으로 가지를 잡지 않고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전신(全身)이 늘어져 있을 때, 밑에 지나가는 이가 ‘달마 스님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물을 것 같으면 어떻게 답을 하려는고?”
그 화두가 있습니다. 네 그것을 참구를 해서 알도록 해라. 그 화두를 탔거든요.
   답을 하려니 수십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몸이 박살이 날 것이고, 가만히 있으려니 벙어리가 되어 묻는데 어기고.
   그 화두를 타가지고 그것이 2년 5개월 만에, 밤에 그 당시 전기도 별로 없고 해서 법당에 예불하러 가다가 발에 돌이 채여서 넘어졌는데 일어나다가 그게 해결이 되었거든.
그래가지고 조실스님 방에 찾아가서 답을 척 했거든.
답을 척 하니, 종전에 막혔던 게 척척 나가거든.
그 투자(投子) 선사라고 하는 유명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 명성을 듣고 수좌가 찾아오니까,
   “그대가 어디서 왔는고?” 하니
   “항소에서 왔습니다.”
서울, 대구, 진주처럼 항소는 지명입니다.
   “항소에서 왔을진대 항소의 천하 제일가는 보배칼을 가져왔는가?”
항소 땅에서 천하 제일 가는 보배칼이 있었는데 호란의 난 중에 전쟁가운데 분실한 유래가 있어요. 거기서 왔다 하니 “천하제일 가는 보검을 가져왔는가?” 하니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거든. 그러니까 투자 선사가 아주 칭찬을 했습니다.
그걸 물으셔. 어째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느냐?
   “삼황(三皇)의 무덤 위에 풀이 한 길이나 무성했습니다.” 그랬거든.
복희, 신농, 황제 삼황의 무덤 위에 풀이 한길이나 무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답을 모릅니다.
   그러니 관문을 통과했고, 아까 그 저 고양이 법문 묻는데 있어서 신짝을 이고 나간 것도 척척 나오지, 일러도 삼십 방을 맞고 이르지 못해도 삼십 방을 맞는다 하는 것도 묻는데 척척 나왔거든요. 그리 했지만. 한 가지 막힌 게 있었어.
마조(馬祖) 도인이라고 위대한 도인이 있었는데, 돌아가실 즈음에 살림하는 원주(院主: 절 살림을 맡은 스님) 스님이 아침마다 문안을 했어요. “밤새 편히 주무셨습니까?” 문안을 드리니,
   하루는 마조 선사가 하는 말이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과거 부처님 명호(名號)를 들어 말했거든. 과거에 일면불이 있었고 월면불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밤새 존후가 어떠합니까?’ 하는데 ‘일면불 월면불’이라 하는지 답을 해봐라.” 하는데 거기에 꽉 막혔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5년 동안을 씨름을 했구마는. 그걸 알아 답을 해가지고 여름 해제일에 대중을 위해서 해제법문을 하려고 향곡 선사께서 법상에 오르셨어요. 나가서 예삼배를 올리고는,
“선사님께 한마디 묻고자 합니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아신 진리는 묻지 아니하거니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알지 못한 심오한 일구(一句)를 일러주십시오.”
   아주 깊고 깊은 진리를 일러주십시오 하니까,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하시거든.
   “그 답은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인이 다 아신 답입니다.”
하니까,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하시거든. 육육은 삼십육이라 하는데 있어서 가타부타 말을 안 하고 큰절을 하고는 나와버렸거든요.
   그러니 향곡 선사께서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다 마친다.”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와버렸어요. 그건 멋진 문답이거든요.

- 설명 좀 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뜻입니다.
▶그건 도를 알아야 되지. 천하에 그걸 아는 사람이 없소.
그래서 뒷날 위의(威儀)를 갖추고 다시 향곡 선사를 찾아가서,
   “부처의 눈[佛眼]과 지혜의 눈[慧眼]은 묻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눈입니까?” 도를 닦아서 홀연히 대오견성을 해가지고 부처도 삼십 방을 때리고 도인도 삼십 방을 때리는 이러한 납승의 눈입니까?
하니,
   “師姑元來女人做(사고원래여인주)니라.”
   나이 많은 비구니는 원래 여자가 비구니 노릇을 하느니라. 그렇게 답을 하시거든.
   나이 많은 여승은 원래로 여자가 비구니 노릇을 하느니라. 여자가 비구니가 되지, 남자가 비구니 되는 게 아니거든. 남자는 비구가 되고.
그러니,
   “금일에야 선사님을 바로 봤습니다.” 살림살이를 바로 봤다 그 말입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느냐?”
십년 동안 한집에서 살았는데 “너가 어느 곳에서 나를 봤느냐?” 하는데,
   빗장 관자 “관(關)” 하니
   “옳고, 옳다.” 하면서 법의 인증서, 전법게(傳法偈)를 써 주셨습니다.

        付眞際法遠丈室(부진제법원장실)
        佛祖大活句(불조대활구)
        無傳亦無受(무전역무수)
        今付活句時(금부활구시)
        收放任自在(수방임자재)

        진제 법원에게 부치노니
        불조의 대활구는, 부처님과 조사가 깨달은 바른 눈은
        전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나니
        이제 그대에게 바른 진리의 눈을 전하노니
        만 사람에게 진리의 전을 펴거나 거두거나 그대에게 맡긴다.

하는 인증서를 써 주셨습니다. 그러니 인증서 없는 도인은 도인이 아닙니다. 바른 눈을 갖추지 못했거든.

- 그걸 받고 난 뒤로 갑자기 세상 보는 눈이 확 달라졌습니까?
▶아니, 깨달을 때. 깨달을 때 진리의 세계가 활짝 열리니까.

- 깨닫고 나서 보니까 세상이 별거 아니구나, 나도 별거 아니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드셨습니까?
▶아니. 세상이 온 천지가 진리의 꽃이구나. 하하하. 진리를 찾아서 몇 생을, 몇 년을 헤맸는데, 진리가 바로 목전(目前)에 다 진리가 아님이 없구나.
그런데 이것은 아는 자만이 알지 이걸 다 모르오.

- 그런데 큰스님, 아는 자만이 안다고 하게 되면 그야말로 몇 사람들끼리 즐기는 거죠. 일반 대중들에게 무슨 보탬이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를 바로 보라’고 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의 참모습, 거기에 금은보화가 다 들어있다 그 말입니다. 진리의 금은보화가.

- ‘깨닫고 나니까 온 주변이 다 진리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목마르면 차 먹고, 배고프면 밥 먹고.

- 그걸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도 다 아는데.
▶하하하. 그 진미(眞味)는, 내막의 진미는 세상 사람들은 맛을 모르지요.

- 스님 그 뒤로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까?
▶흔들림이 뭐 있겠습니까? 일상생활이지.

- 근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런 고뇌 중에 일반 속세인들한테 가장 큰 고뇌는 죽음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것이 죽음의 문제인데, 이 도를 알면 그것이 환화(幻花)입니다. 꼭두각시. 환이다. 허공 꽃. 눈을 때리면 번쩍하고 허공 꽃이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게 실제 있는 게 아니거든. 일시적으로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지요.

- 죽음이 있는 게 아니다. 죽음이 없다. 원래 산 것도 아니니까 죽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열반하실 때 뭐 제자들도 울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은 중생의 틀을 못 벗어서 그래요. 중생의 굴레를 못 벗어서 그렇지. 하하하.

- 실제 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승대덕이라 하더라도 보면 실제로는 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제자들은 거기에 대해 애통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도를 몰라서 그래요. 도를 모르니까.

- 사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까?
▶아니. 그건 자기의 참모습을 못 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요.

- 스님의 참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하하. 아까 들어서 척 보였는데. 또 내게 물으면 어찌 되는고? 허허허 참.

-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 일반 중생들에게 어떻게 위안의 말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 사람이 죽음 앞에는 다 공포가 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 참나를 찾는 이 수행에 몰두할 것 같으면, 힘을 얻습니다. 정력(定力)의 힘을. 힘을 얻어서 자기의 참모습을 관(觀)을 하거든. 그러면 모든 환상이 다 없어집니다. 공포, 불안, 환상이. 숨 떨어지면 맑은 정신으로 몸뚱이를 벗어버리지요.

- 큰스님, 저의 참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참선을 해서 참나를 봐야 되지, 내가 잡혀줘도 모르거든. 그러니까 스스로 진리의 눈을 활짝 열어야 됩니다.
운봉 선사라고 나의 노스님이신데, 임종 한 달 전에 제자가 물었거든요.
   “스님, 언제 사바세계를 여의고 열반락에 드시렵니까?”
그러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토끼 꼬리 빠진 날 가지.” 하거든. 정월 달은 범달이요, 이월 달은 토끼 달이요, 삼월 달은 용달이거든, 토끼 꼬리 빠진 날 가지 하는 것은 이월 마지막 날 간다 그 말이거든.
그러니까 음력으로 2월 그믐날, 가까이 제자들을 다 불러놓고는,
   “내가 오늘 마지막 법문을 하고 가리니, 의심처(疑心處)가 있으면 물어라.”
그러니 제자가 물었거든.
   “어떤 것이 진리의 도입니까?”
   “진리의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님일세.”
   “스님이 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서 바른 진리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까?”
하니, 육자배기를 한 수 읊으시거든.
   “저 건너 갈비봉(峯)에 비가 묻어오는데, 우장 삿갓을 두르고 논에 김을 매러 갈거나.”
   마지막 가는 무렵에 이런 멋진 시조를 읊는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공포, 불안이 호리도 없습니다.
   “스님이 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서 바른 진리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까?” 하는데 왜 “저 건너 갈비봉에 비가 묻어오는데, 우장 삿갓을 두르고 논에 김을 매러 갈거나.” 육자배기를 부르고는 가시려고 하니, 좌우에서 “스님! 스님!” 하고 부르니 “나를 불러 무얼 하려고 하느냐?” 하고는 그만 가셨거든. 이것이 바로 공포 불안이 없는 열반상의 모습입니다.

   또 혜월 선사는 운봉 선사의 스승이거든요.
   일제가 36년간 우리나라를 통치할 무렵에, 남총독이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해서 일본에서 건너올 적에, 임진왜란 당시에 삼천리 강산을 다 집어삼켰다가 서산ㆍ사명 대사 두 분 때문에 평화조약을 맺고 그랬거든요. 그러니 한국에 가거든 선사와 도인을 조심해라 그랬거든요.
그래 와서 남방에 혜월 선사가 유명하다 하니 수하 몇몇을 데리고 혜월 선사를 방문했거든요. 인사를 나누고는,
   “스님, 선사님께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물으라 하니,
   “어떠한 것이 부처님의 가장 높고 깊은 진리입니까?”
하고 아주 고준한 일문을 던졌어요.
   “높고 깊은 부처님의 진리? 귀신 방귀에 털이 났지.”
그러니 그 한 마디에 얼떨떨해서 무슨 소린지 몰라 남총독이 돌아가 버렸거든.
남총독이 혜월 선사에게 방망이를 맞고 돌아갔다 하는 소문이 우리나라는 말 할 것도 없고 일본에까지 퍼졌거든요. 그러니 남총독의 병사 제자가 듣고는 분개해서 장검을 차고 건너와서 혜월 선사 계시는 방에 노크도 안 하고 구둣발로 들어와서 장검을 빼서 혜월 선사 목에다 딱 대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칼을 대니 혜월 선사가 손가락으로 병사의 등 뒤를 바로 가리켰어요. 죄 없는 선사의 목을 베려고 하니 자기도 불안하지. 뒤를 가리키니 자기를 헤코지 하는 사람이 뒤에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는 찰나에 혜월 선사께서 번개같이 일어나서 “내 칼 받아라!” 하고 병사의 등을 쳤거든.
   그러니 병사가 칼을 거두고는 큰절을 하면서 “과연 위대합니다.”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혜월 선사가 우물쭈물 했으면 즉시 목이 달아납니다. 그 당시에는 인권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와 같이 석화전광의 바른 지혜의 눈을 갖추면 상대를 꿰뚫어 봅니다.
   그러니 남방에는 혜월 선사가 유명했습니다.
   그러다가 항시 노령(老齡)에는 산에 가서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와서 방에 불을 지피고 그렇게 생활을 하시다가, 하루는 항시 절 밑에 솔방울을 지고 내려오다가 앉아서 쉬는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서 솔방울을 반쯤 지고 일어나는 자세로 이 몸뚱이를 벗어버렸습니다.
그 때 상좌들이 카메라가 있었으면 멋진 촬영을 해 놨을텐데. 보통 사람은 숨 떨어지면 거꾸러져 버립니다. 이것이 일생 도를 닦은 저력 아닙니까? 도의 힘이 거기서 생기는 겁니다. 이건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예, 그런데 실제적으로 죽음도 초월하고 모든 문명도 다 끊고 스님의 길을 걷는데요, 적지 않은 스님들은 여전히 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름이나 권력에 집착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건 중물이 안 들어서 그렇습니다. 속심(俗心)이 그대로 차 있어서 그래요. 그건 중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천지지요.

- 큰스님께서 보면 속세에서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애쓰고, 우리 일반 서민들이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용쓰고 이러는 것을 보면 가소롭습니까? 어떻습니까?
▶농민들이야 성실히 사니까 참 좋은 분들이지요.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정치는 초등학생 정치 아닙니까? 한국 정치가. 여야가 동서(東西)로 달리고, 대립을 하고, 국민 세금을 엉뚱한데 쓰고, 한마디로 밥값을 못합니다. 정치라는 것은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라야 안 되겠소?

- 본인들은 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국민이 투표할 때 보세요. {투표율이} 반(半) 될둥 말둥 하거든. 그만큼 다 실망을 합니다. 여야가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고 참으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지면 뭐 다투고 이러한 일이 있겠소? 국회의사당에서 서로 친밀히 해서 조금 서로서로 양보를 하고 좋은 안을 처리를 해줘야 대통령도 멋지게 추진을 잘 하시겠지요. 지금 계류되어 있는 안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 지금까지 보면 정치권에 대해서 좀 똑같은 얘깁니다. 그 말씀 자체가 진부한 늘 나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정치인들이 그걸 몰라서 안 그러겠습니까? 다 똑똑한 사람들인데.
▶우리나라는 참말로 정치가 너무 뒤떨어졌다고 봅니다. 왜 자기 고집만 세워가지고 서로 원수들끼리 만난 듯이 그러면 안 되거든요. 서로 안(案)을 하나 내 놓고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나만을 위해서 하는 살림살이가 아니니 잘 보살펴서 통과시켜줘야 집행을 하고 할건데, 그러한 마음 자세가 안 되어 있습니다. 여야가 원수끼리 만난 것 같이 서로 반대에 반대를 하거든. 그 정신사상은 앞으로 고쳐야 됩니다.

- 그러면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모든 분들이 ‘나’라는 허상을 다 놓아버리고, 생활 속에 ‘참나’를 찾는 참선, 지혜를 밝히는 선수행을 생활 속에 닦아야 됩니다. 그러면 ‘나’라는 허상이 싹 없어지고 지혜의 눈이 열려 사리판단이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 큰스님 눈으로 보면 권력 그 자체가 우스운 것입니까?
▶하하하. 옛날 성인들이 하는 말씀이
“정치는 원래 군자는 하지 않는 법이라.”
옛 성인들이 다 말했거든요.

-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종교도 권력이다’ 이렇게 보고 있거든요.
▶종교도 바른 신앙을 가져야 되지 허깨비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내실이 있는 그러한 수행이 근본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인아상(人我相)이 다 없어지고, 갈등이 다 없어지고, 평화로운 그러한 마음의 안정이 오고 그렇습니다.

- 언론에서 지켜보면 종교라고 하면 중생, 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깨우쳐 주고 이런 역할을 해야 되는데, 뭐 일부 종교인들은 분열시키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나는 항상 법문을 하기를, 참나를 보는 이 수행을 함으로 인해서 마음의 갈등이 말끔히 제거가 된다.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또 밝은 지혜를 갖춤으로 인해서 사물에 정확한 판단을 가져오고. 모든 부모가 생활속에 참선을 함으로 인해서 말없는 가운데 아이들이 따라온다. 부모의 용심과 행동에. 그러니 온 가정이 평화로와 질 수 있다. 온 가정이 평화로우면 나라도 다 평화로와 지니까, 생활속에 참나를 찾는 이 수행에 몰두할 것 같으면 모든 갈등이 싸악 없어지고 평화로운 국토가 되리라고 보니까 불자들은 항시 참나를 찾는 이 수행에 몰두하면 허송세월이 없고 부끄러운 여생이 없을 거라고 항시 강조를 합니다.

- 큰스님은 진리를 보고 계시고 스스로 깨달으시고 항시 즐거우신데, 일반 중생들은 지금도 먹고 살기 힘들지 않습니까? 좀 불공평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큰스님께서만 홀로 유유자적 즐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지은 과보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인연을 좇아서 좋은 설교를 듣고, 좋은 생을 하루하루 실천하는 거기에 모든 과거생에 지은 악업이 소멸되는 동시에 생활이 윤택해지고 마음의 번뇌가 없어집니다.

- 그 말씀이 제가 드린 질문의 답변이 될 수 있습니까?
▶하하하. 답으로 좋지요. 중생의 고뇌는 전생의 업의 소산이라. 그러니까 법문을 듣고 참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가운데, 자기의 의무에, 농사를 짓든, 직분을 하든 충실히 하거든요. 충실해야 되지, 수확이라는 것은 시기를 놓치고 게으르면 수확을 거둘 수가 없거든요. 부지런히 가꾸고 거름하고 물주고 해야 수확을 거두는 것과 같이 인생생활의 모든 것이 동일합니다. 직분도 아주 성실하게 열중하는 거기에서, 모든 동료들은 열심히 하는데 혼자 게으르게 하고 눈치만 보고 그러면 다들 싫어해서 그 자리를 잃게 되지요.
   잘 사는 데는 ‘성실’이 제일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도 성실하고 보는 눈도 성실하기 위해서는 생활속에 참나를 찾는 수행을 쭈욱 연마를 하면 인간의 허상이 다 녹아 없어집니다. 그러면 직장생활이 내 직장생활이 되어 버리거든. 주인이 되고. 직장생활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어버리는 거야. 주인의식이 되어가지고 성실하게 화목하고 모든 동료들과 같이 총애(總愛)를 이뤄가지고 잘 지내게 되지요.

- 대부분의 서민들은 아주 성실한 편인데, 그런데도 왜 이리 먹고 살기 힘듭니까?
▶그것은 전생에 복을 못 지어서 생활이 그렇지요.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서 반발심을 내어서는 안 되고 모든 넉넉한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을 잘 도와드리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다 보면 윤택해지고 그럴 겁니다.

- 전생, 윤회 말씀을 하시니까, 별로 반박할 말은 없습니다만. 전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참 그게 안타깝습니다.
▶다 같은 우리 동포지만 남북이 갈리니까, 이북에는 비참한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전생의 과보입니다. 복을 못 지어서 거기서 머무르게 되고 거기서 태어났거든요. 이북에다 비교하면 남쪽에는 얼마나 윤택한 문화생활을 누립니까? 자유도 있고.

- 운명론 비슷하게 들립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거든요. 그 원리입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이. 이북 같은 저런 데도 지도자를 못 만나 가지고 억압에 모든 국민들이 얽매여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남북 통일이 되어 좋아지는 여건이 될 수가 있는데. 그 몇몇 지도자들이 자기의 허상에만 치우치다 보니 고통 받는 국민이 많지요.

- 스님들 중에 계율을 잘 안 지키는 스님들이 많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계율을 지켜야 되는 겁니까?
▶이 많은 큰 단체에 별별 스님들이 다 있지요. 없을 수가 없지요. 그것{계율}은 도를 닦는데 있어서 응당히 서릿발 같이 지켜야 됩니다.

- 어떤 스님들은 ‘나는 이미 단계를 다 넘어섰기 때문에 무애지인(無碍之人)이다. 무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면서 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한테 찾아와 보라고 하세요. 인가를 받으라 하세요. 인증을. 하하하. 한번 보내세요. 그러면 척척 바른 답이 나오면 내가 인증을 할테니까. 저 원효 대사와 같이 대자유인이 될는지 한번 점검을 하지요. 하하하.

- 스님은 지금까지 (계율을) 철저히 지켜오셨습니까?
▶예, 하하하.

- 어리석은 질문을 또 하게 됩니다만, 그 지키는 삶 자체가 굉장히 단조롭고 딱딱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유인이 되면 아무 것도 구애를 안 받습니다. 하하하.

- 큰스님 저 지금도 새벽 2시에...
▶예. 지금도 9시 반에 자고 새벽 2시 반쯤 일어납니다.

-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까?
▶그렇게 절집 생활을 해왔습니다. 굳어졌어요.
세 시 되면 예불을 하니까 그 안에 예불 준비를 하고 종치면 법당에 다 모이거든요. 예불을 모시고 예불을 모신 후에는 스님네들은 두어 시간 참선을 하고, 나는 나대로 또 뭐 하고.

- 큰스님께서는 꼭 그렇게 안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든 분들은 어른의 일거일동에 다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하하하. 시집살이를 해야 대중들이 따라오거든. 그래서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예불은 꼭 참여합니다.

- 한번 도를 깨치게 되면 그걸로 평생을 갑니까? 흔들림이 없습니까?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가지요. 나고 날 적마다 가지요. 한 번 깨달아 놓으면 일월과 같이 항시 밝은 지혜가 있어가지고 허공이 어디 변함이 있습니까. 태풍이 아무리 불고 풍우가 쳐도 그 위에 허공은 항시 밝아 있듯이 그렇게 됩니다.

- 큰스님께서 속세 나이 서른 세 살 때 그렇게 하셨죠?
▶서른 세 살 때 인증을 받았지요.

- 그러면 서른 세 살 때 인증을 받고 난 뒤로 현재까지 생각의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겁니까?
▶항시 진리의 가운데서 생활하지요. 그 가운데 깨달은 살림살이가 다 있으니.

- 보통 사람들은 해가 바뀌면 생각이 조금씩 바뀌지 않습니까?
▶진리의 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허공이 변천이 어디 있습니까? 항시 사시절 똑같지요.

- 그러면 얼마나 단조롭습니까?
▶단조로운 가운데 무한한,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진리의 낙이 있습니다.

- 큰스님, 진리의 낙 말고 일상생활의 낙은 어떤 겁니까?
▶진리의 낙이 일상생활의 낙이고, 일상생활 그 가운데 진리의 낙이 다 있거든.
그래서 목마르면 차 마시고 고단하면 쉬고, 산책하고, 손님 만나면 대담하고, 그 외에 다른 진리의 낙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 가운데 다 있지요.

- 사는 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관심,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내년에 어떻게 될까 뭐 이런 게 삶의 동력 아닙니까?
▶그런 게 없습니다. 그건 세상사람 중생심에서 나온 것이지요. 도의 바탕에서 항시 생활합니다. 그래서 허공의 비유를 했거든요. 허공은 사시사철 허공이거든. 풍우가 아무리 친다고 해도 허공이 어디 변합니까? 항시 밝아 있지요.

- 그럼 사는 게 뭐가 재미가 있습니까?
▶하하하. 그 가운데 큰 진리의 낙이 있습니다. 너니 나니 하는 인아상이 없는 구속 없는 대자유인의 낙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나를 바로 보라. 참나를 바로 보는 그 가운데 모든 진리가 다 있다. 예수교, 천주교는 하나님을 찾는 종교이고 불교는 다릅니다.
불교는 진리를 깨달아야 진리의 낙을 누린다 합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진리의 눈이 열리지 못하면 태산이 가려가지고 진리의 세계와 항시 거리가 멀다. 진리의 낙을 알아야 모든 도인과 모든 성인과 더불어 동참하는 낙을 누립니다.
그러니 불교를 믿는 이들은 그러한데 인연을 두텁게 맺고. 서구에도 모든 지식인들이 불교, 선을 좋아하는 것은 예수교를 믿고 하나님을 찾아야 마음의 갈등이 해소가 안 됩니다. 공포, 불안, 초조, 갈등. 이 선(禪)을 해 보니 모든 잡념이 다 소멸이 되고 아주 밝은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가니 그 사람들이 거기에 매료가 된 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70년대 유럽에 여행을 가니, 예배당을 다 창고로 만들어서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과학에 뒤떨어진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랬습니다. 70년도에 가니까.

- 큰스님, 공부 안하는 스님들 보면 어떻습니까?
▶공부 안하는 스님은 여기에 부지를 못하지요. 방부를 안 받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열심히 공부에 생명을 걸고 하는 사람만 여기와 동화사와 받지, 놈팽이는 안 받습니다. 하하하.

- 아니 농땡이 치는 사람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일사불란하게 화두와 씨름하지요. 전국에서 모범적인, 도를 깨닫겠다고 모여든 스님들이 있는 곳은 동화사 선방하고 여기일 겁니다. 동화사는 14시간, 여기는 12시간.

- 큰스님은 그렇게 안 하시지요?
▶나는 그렇게 안합니다. 시간이 나면 한 번씩 들르지요. 신도들도 접대를 해야 되고. 모든 감독도 해야 되고. 나는 나대로 바쁘지요.

- 큰스님께서는 오는 손님 막지 않는다. 그런 말씀도 하셨다고 하던데요.
▶공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물으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 보통 큰스님들은 일반 대중들이 친견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접대와 점검을 하는 것이 나의 의무거든요. 공부도 점검하고, 바른 지도를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니까 등한히 할 수가 없습니다.

- 공부하는 법은 어떤 부분을 가르칩니까?
▶화두를 줘서 화두를 들고 일념삼매가 되어서 바른 깨달음을 얻도록, 진리의 문에 들게끔 그렇게 지도를 합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참나 가운데 모든 우주의 진리가 다 있으니, 참나를 바로 알아 오너라.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천번 만번 화두 의심을 밀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참의심이 시동이 걸립니다. 참의심이 시동이 걸리면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밤낮으로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갑니다. 밤낮으로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가면 모든 분별은 다 재[灰]가 되고, 앉아 있어도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모르고 사물을 봐도 보는 감각이 없고 시간이 쭉 흘러갑니다. 거기서 무르익어지면 사물을 보는 찰나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납니다. 그러면 이걸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점검을 받으러 찾아옵니다.
   그러한 점검을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천마외도다.”
   그러한 역할의 전등의 법을 전해 내려오는 것이 오늘날 한국에 있습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다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흘러 와가지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공산화 60년에 싸악 없어졌고, 인도도 그렇고. 한 가닥 한국에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중국, 일본의 선사들을 모셔놓고 2002년도에 국제무차선대법회를 개최했습니다.

- 큰스님, 저한테 주시고 싶은 화두가 있습니까?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알면 모든 법문이 이 가운데 다 있습니다. 석가도 이것을 아셔가지고 위대한 진리의 스승이 되었고, 모든 도인도 참나 그 가운데 진리가 다 있거든요. 참 좋습니다.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은 참 말이 아니지요. 불쌍한 사람이지요.

- 부모에게 나기 전에 제가 있었습니까? 분명히 있는 겁니까?
▶예, 있지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지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 큰스님, 저같은 중생과 대화하시니까 좀 답답하시지요?
▶이런 대화도 좀 오랜만에 하는군요. 하하하.

- 큰스님 보시기에 세상은 진짜 고해입니까?
▶도를 깨달으면 지상 극락이 되고, 도를 모르는 사람은 아비지옥이 되고 그렇습니다.

- 아니 일반사람들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닙니다.
▶극단적인 게 아니라, 고뇌ㆍ고통이라는 것은 사람사람의 전신(全身)을 얽어 있습니다. 일시적 조그마한 낙이지 고가 3분의 2는 되거든요. 3분의 2는 고통 가운데 근심 걱정에 살거든.
3분의 1은 조그마한 낙이 있지. 그러나 온전한 낙은 도를 깨달아야 온전한 낙을 누리게 됩니다.

- 큰스님은 깨달으셔서 낙을 누리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일반 사람들은 낙을 누릴 수 없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오욕락에 찌들어가지고 진리의 낙을 모르니까 고통 가운데 삽니다. 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도인이 되면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편안한 낙을 누리게 됩니다. 구하는 거기서 무한한 고통이 머리를 다투고 일어납니다. 출세를 해야 되지, 돈을 많이 벌어야 되지, 남보다 호화로운 생활을 해야 되지. 그래서 세상에 아귀다툼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이, 가지려고 하면 거기에서 고통이 옵니다.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면.
그러니까 항시 양보하고 베푸는 미덕을 가지면 그러한 고통이 덜할 겁니다.

- 그런데 실제로 절집을 먹여 살리는 것은 중생들 아니겠습니까? 중생들이 그렇게 경쟁을 하고 용심을 내고 그 다음에 아등바등 살아가지고 다 절집에 바치지 않습니까?
▶예. 그런데 그 댓가로 바른 용심과 바른 행동, 복이 되고 덕이 되는, 지혜를 계발하는 그 법을 가르쳐 바른 지도를 하지 않습니까?

- 이번 주말에 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서 연등도 많이 달리지 않습니까?
▶마지막 한마디를 내가 적어 놨어요.
백화쟁발위수개(百花爭發爲誰開)오
자고제처백화향(??啼處百花香)이라.
백 가지 꽃이 피는 것은 누구를 위해 핌인고?
자고새 우는 곳에 일백 가지 꽃이 향기롭다.
이러한 좋은 경치를 모든 국민이 감상할 때는 모든 고통과 마음의 갈등을 다 잊어버리고 좋아합니다. 이러한 백화가 쟁발하고 자고새 우는 이러한 것을 맛을 보는 그러한 용심을 누리십시오.

- 스님 이것을 해석해 주셔야 됩니다. 백화쟁발위수개 하는 것은 무슨 뜻으로?
▶백가지 꽃이 만발하고 좋아서 봄꽃놀이를 안 갑니까? 그 만발한 꽃을 온 가족 온 국민이 놀이를 가면 좋아하거든요. 그 아름다운 마음.
또 자고새가 울 때는 백 가지 꽃이 향기롭거든. 그것을 구경하는 그 아름다운 용심을 일상생활에 가지십시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러한 뜻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해서.

- 큰스님 늘 웃고 마음이 편안하시니까 건강하신 듯합니다.
▶예. 마음이 편안하면 건강에도 좋습니다.

- 저희는 늘 세사(世事)에 찌들어 살고 다투고 하니까, 출가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생활속에 참나를 찾으면서 살면 찌들은 생각이 싸악 없어져 버립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집에 와도 그렇고 산책할 때도 그렇고 가고 올 때도 그렇고 그러면 복잡한 것을 싸악 잊어버립니다. 모든 국민에게 그러한 화두 드는 법을 유포를 시켜주세요. 그러면 편안한 극락세계가 될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랬거든요.
백가지 꽃이 만발한 것은 누구를 위해 핌인고?
자고새가 우는 곳에 일백 가지 꽃이 향기롭다. 그 꽃구경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모든 국민이 가지십시오. 하는 뜻에서 마지막에 선사를 한 겁니다.

- 대담 :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부산 해운정사, 2009년 4월22일)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