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一如體玄하야 兀爾忘緣하야
    일여체현 올이망연

   '일체 만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묘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제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건가(釋迦猶未會어니 迦葉豈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 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50.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萬法이 齊觀에 歸復自然이니라
    만법제관 귀복자연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 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 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51.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泯其所以하야 不可方比라
    민가소이 불가방비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 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2.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止動無動이요 動止無止니
    지동무동 동지무지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한 다음에 두 법을 부정하였습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 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 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 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照) 없애 버림으로써 (常寂)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 고요하면 항상 비추는 (寂而常照) 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다 (遮而照)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 (遮照同時) 중도 정의는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통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 (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53.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양기불성 일하유이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54.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究竟窮極하야 不存軌則이요
    구경궁극 부존궤칙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거기서는 중도라 할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경하고 궁극한 법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법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 해서 단멸(斷滅)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55.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契心平等하야 昭作이 俱息이로다
    계심평등 소작 구식
   
   내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 망견을 찾아볼 수 없고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이 산 위로 솟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은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함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쉰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바로 일체 변견을 다 쉬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56.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바르게 되어
    狐疑가 淨盡하면 正信이 調直이라
    호의정진 정신조직

   자기의 일체 변견과 망견을 다 버리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 화살같이 곧게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正信)이란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의 전체를 통한 데서 나오는 믿음이며, 처음 발심하는 신심(信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경을 성취하면 바른 믿음이라 하든 정각(正覺)이라 하든 여기서는 뭐라 해도 상관 없으니, 이것이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수행의 지위가 낮고 정각은 수행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근본을 바로 성취한 사람을 믿음이라, 각(覺)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조사라, 무어라 해도 상관 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바로 성취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름은 무엇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57.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一切不留하야 無可記檍이로다
    일체불유 무가기억

   객관적으로 일체가 머물지 못한다거나 주관적으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머물 것이 있고 머물지 못할 것이 있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는 능(能) 소(所)가 붙으므로 바른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는 바른 믿음이 곧고 발라서 진여자성이 현전해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못하고 또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기억할래야 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무슨 기억을 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58.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허명자조 불로심력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명(明)이란 일체를 비추어 다 살아나는 것으로서, 즉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허(虛)가 명(明)을 비추고 명(明)이 허(虛)를 비춰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遮照同時)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자성의 묘한 작용이므로 마음의 힘으로써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9.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非思量處라 識情으론 難測이로다
    비사량처 식정난측

   대도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깨쳐야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의 사량은 거친 사량(추思量)이라 하고, 성인의 사량은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사량(微細思量)이라 하는데 거친 사량은 그만 두고, 미세사량으로도 대도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성인도 허허로이 밝게 스스로 비추는 무상대도는 알 수 없고,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妙覺)만이 그러한 무상대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냐 하면 바로 진여법계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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