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년(辛未年) 동안거 금모선원 정진대중과의 문답

문 : 저는 지금까지 이 참선 공부는 어떤 화두를 들든지간에 밑바닥까지 완전히 깨닫는 상태가 온다면 확철대오(廓撤大悟)까지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향곡(香谷) 큰스님께 찾아가셔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타 2년 만에 해결해 내셨는데,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5년을 참구하셔서 비로소 막히는 바 없이 상통(相通)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화두로 완전히 깨치지 못하신 원인은, 화두상에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입니까?
   만일 화두상에 깊고 얕음이 있기 때문이라면, 참학자(參學者)가 애초부터 얕은 것보다는 깊은 것을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답 : 화두에는 법신변사(法身邊事)의 화두가 있고, 여래선(如來禪)의 화두가 있고, 향상구(向上句), 향하구(向下句)의 화두가 있고,  최초구(最初句), 말후구(末後句)의 화두가 있고, 일구(一句), 이구(二句), 삼구(三句)의 화두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종사(本分宗師)들은 항시 최고의 진리의 화두를 간택해 주지, 법신변사와 같은 화두로 간택(揀澤)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역대 조사 스님네들을 보건대, 두 번 세 번 깨달은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그것은 왜 그러하냐면, 일념무심(一念無心) 삼매(三昧)에 들어가서 삼칠일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고 흐르는 그 가운데서 해결이 되면 더 깨달을 것이 없이 여지없이 깨닫게 되는데, 일념무심 삼매가 안되고 홀연히 깨닫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런데 그것은 힘이 미약해서 낱낱 법문을 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참구해야 된다. 두 번 세 번 깨닫게 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향상구, 향하구를 들어서 일념무심 삼매에서 해결이 된다면, 그것은 여지없이 깨달아 더 깨달을 것이 없다.
   
문 : 스님께서는 일념삼매(一念三昧)를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셨습니까?
답 : 일념삼매나 오매일여나 다 일념(一念)이 지속된다는 그 말이다. 진의(眞疑)가 돈발(頓發)하여 화두일념이 현전(現前) 되면 그대로 삼매(三昧)에 들어 자나 깨나 흩어지지 않고 지속된다.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이지.

문 :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천오백년 전에 새벽별을 보고 깨치신 그 경지와  스님께서 깨치신 경지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만일 이 물음에 대한 답에 털끝만큼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스님께서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답 : 허허허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은 성품을 보았다는 것 아니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성품을 보셔서 각(覺)을 이루신 것이고, 역대 도인들께서도 다 자기 심성을 보셔서 깨달으신거고, 견성(見性)자리에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天魔), 외도(外道)라 하지 않았는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면밀히 정법(正法)을 이어온 선사로부터 인증(印證)을 받으라고 하셨던  것이고, 독불장군(獨不將軍)으로 '내가 견성했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견성법 문중에서는 조작이 없고 거짓이  없게 하기 위해서 먼저 깨달은 선사로부터 인증을 받아야 하는 가풍(家風)이 서 있는 것이다.

문 : 스님께서 확철대오(廓撤大悟) 하셨다면 대기대용(大機大用)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셔서 걸림이 없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옛 조사스님네들이 뱉어놓은 찌꺼기들,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니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 하는, 그러한  것들이나 주창(主唱)할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이 시대 상황에 맞고 이 시대 근기(根機)에 맞는 화두를 창안(創案)하셔서, 그것을 가지고 참구케 하여 빨리 눈 밝은 납자(衲子)들을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답 : 허허. 그래서 법문(法門)할 때 내 말 안하더냐. 화두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제불조사(諸佛祖師)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만인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이 이 공안(公案)이다. 그러면 그 깨달은 진리의  세계에 옛이 있고 이제가 있는가?

   그리고 한번 생각해 봐라. 부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못 만드셨겠느냐. 일생 데리고 다니셨던 아난존자(阿難尊者)는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바가 없이 그렇게 총명했는데,  위대한 부처님이 무엇이 부족하셔서 아난을 견성도인(見性道人)으로 못 만드셨겠느냐?
   네 논리대로 하면, 아난은 부처님으로부터 깨달음의 기연(機緣)을 얻지 못했고 가섭존자의 방망이를 맞고 깨달았으니, 가섭존자가 부처님보다 낫겠네?

   그러면 이것은 어찌 생각하느냐? 부처님께서 그러셨다. 가섭존자에게 법을 전하실 적에는 자신과 똑같은 심안(心眼)이 열렸기 때문에,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涅槃妙心)을 가섭에게 부친다.' 하셨다. 가섭존자는 또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난존자에게 법을 부치셨겠느냐? 서로 상통(相通)이 되니까 그런 것이지. 그것이 쭉 연달아 내려오는 것이 법맥(法脈) 아니냐. 왜 아무한테나 법을 전하지 않고 하필 그 사람 그 사람에게 쭈욱 전해내려 왔겠느냐?
   사조(四祖)선사도 상통하는 이가 없어서 법을 전하지 못하고 계시다가, 80대 노인이 와서 상통되었는데 너무 연로(年老)한지라 몸을 바꿔오라하여 법을 전하신 것 아니냐. 그리하여 오조(五祖)선사는 육조(六祖) 행자시절에 상통이 되니 법을 전한 거 봐라.
   우리나라는 태고 보우(太古普遇)선사께서 고려 말에 송(宋)에서 법을 이어오셔서 쭉 전해내려 왔는데, 조선 중, 후기 이후 근 백여년  간 단절되었다가 경허(鏡虛)선사께서 다시 이어내셨다. 그 후대에 와서 향곡(香谷)선사로부터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안목(眼目)을 갖추게 되었지. 이것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호리(毫釐)의 착오가 없을 것이다.
   
문 :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향곡 큰스님으로부터 향상구가 다시 신장(伸張)되었다고 하셨는데, 원래 부처님 정법(正法)이 돈오돈수(頓悟頓修)아닙니까? 향곡스님대에 와서 안목이 바로 부처님의 정법 돈오돈수일텐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부처님  정법을 바로 잇지 못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향상구가 돌아가신 향곡 큰스님에게서 펼쳐졌다고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답 : 그렇지, 향상구(向上句)에 이르러야 돈오돈수인데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선사들은 향상구를 모르고 법신(法身)의 경계나 여래선(如來禪)만 알았다. 태고 보우나 환암 혼수 등 몇 분은 중국에서 직접 전해져서 안목이 있었지만, 그 후로 제대로 전수되지 못해 고준한 안목이 단절되었고, 돈오점수 사상에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향곡, 성철 두 분 큰스님께서 향상구를 깨달으신 이후에, 다시 돈오돈수 사상으로 전환되고 부처님의 근본 살림이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아는 이는 한 마디 들어보면 천리 밖에서도 그 사람 견처(見處)를 환하게 안다. 모르는 이는 아무리 손에 쥐어 주어도 알 턱이 없지만.
   요즘 우리나라 근세 선사(禪師)들의 법어집이 많이 나왔지만, 들춰보면 향상구를 제창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덕산탁발화'나 '일면불 월면불', 이러한 고준한 법문을 들어서 제창한 이는 아무도 없거든, 그것은 향상구를 모르기 때문에 제창하지 못한 것이다. 알았나?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바보가 되어 참구하되, 다른 사람이 한 번 바보가 되면 너는 열 번 바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화두를 타파하고 보면 환하게 알게 된다.
   
문 : 책에서 보니 성철(性徹) 큰스님께서 무엇을 물으셨는데 향곡 큰스님께서 거기에 막혀 탑전에 삼칠 일간 정진하셔서 깨치시게 되었고, 거기서 깨치고 보니 방장스님 자신도 모르시는 것을 물으셨더라고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 : 그것은 그대로다.
   "죽은 사람을 죽여 다 하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을 살려 다 하여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殺盡人方見活人 活盡死人方見死人)" 하는 법문이 있다. 방장스님께서 그것을 물으셨다.
   거기에 향곡스님께서 막히셔서 몰록 화두일념(話頭一念)에 들어 밤이 가는지 낮이 가는지 모르고 정진하셨는데, 어떤 날은 탑 난간에  기대어 참구하시던 중에 장대 같은 소낙비가 쏟아지는데도 모르고 서 계셨다는 게야. 그렇게 삼칠일 동안을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빠져 영 등신(等神)이 되어 자신의 몸뚱이까지도 잊어 버리셨다가,  도량을 걷는 중에 문득 자신의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시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던 것이다.
   깨달으시고 보니 질문하셨던 방장스님께서 확실히 아시는 것이 아님을 아시고 방망이를 놓으셨다. 이렇게 두 분이 서로 주고 받으시면서 힘을 얻게 되고 깨닫게 되셨다. 그리하여 이 두 분의 깨달음으로부터 한국 선종사(禪宗師)에 다시 임제(臨濟)골수의 안목(眼目)이 재현(再現)된 것이다.
   
문 : 한 말씀 더 여쭙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만인을 상대해서 설하셨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조금 쉬운 것 같은데, 이 공안법문(公案法門)에 들어와서는 도무지 깜깜해 알 길이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얘기는 제가 부처님 말씀 중에서 깨달음에 대한 것을 착안(着眼)해 본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눈에 있으면 보는 것이요
귀에 있으면 듣는 것이요
손에 있으면 잡는 것이요
다리에 있으면 걷는 것인데
사람이 다만 욕심에 눈이 가리워 보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스님의 법문 중에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공안법문들을 뚫어서 진리의 세계를 환히 볼 수 있겠습니까?
   
답 : 나 뿐만 아니라 조사(祖師) 스님네의 법문은 아주 화살과 같이 찌른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로 방편(方便)을 가지고 울어대는 어린 아이들 달래시는 것이어서, 49년 설법(設法)이 모두 방편이지 법이 아니다.
   반면 조사(祖師)스님들 법문은 날카로운 화살촉과 같이 아주 아프게 찌르는데, 여기에서 참학자(參學者)가 의심이 일어서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들게 되고 업(業)이 소멸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하는 이는 도인스님네, 조사스님네의 일언반구(一言半句)를 금쪽같이 여겨야 한다. 온전히 믿고, 온전히 따르고, 온전히 행하고, 지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지, 무슨 야호(野狐)의심이 있을 것 같으면 선방에서 백년을 살아보아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니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났으면 철저한 신심(信心)으로 지도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하늘을 찌를 듯한 용맹과 태산과 같은 부동(不動)의 자세에서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된다.
   만약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저렇게 해서 될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은 천불 만조사(千佛萬祖師)가 출세(出世)해도 이 일을 성취할 수 없다.
   부처님을 일생 따라 다니면서 모셨던 아난존자(阿難尊者)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에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제자였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부처님의 참법문을 들을 수 없으니 가섭존자에게 가서 물었다.
   "부처님께서 금란가사(金欄迦娑) 외에 따로 전하신 법이 있습니까?"
   이에 가섭존자가 아난을 부르자 아난이 대답하니,
   "문 앞에 찰간(刹竿)을 거꾸러뜨려라."하고 가섭존자가 한 마디 던졌다.
   그래서 아난존자가 잠시라도 졸았다가는 떨어져 죽게 되는 아주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서 용맹정진하여 그 도리를 깨달았다.
   '금란가사 외에 따로 전한 법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문전의 찰간을 거꾸러뜨려라' 했다. 이것이 바로 조사(祖師)의 말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방편을 가지고 어루만져 주셨지 아프게 찌르지는 않으셨거든. 바로 이 한마디가 해결되어서 아난존자는 가섭존자의 법을 전수받았다. 이 법은 천불만조사(千佛萬祖師), 모든 도인의 살림살이가 다 동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법이 계속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 선법이 십삼조사 이후로 더 흥하게 되었던 것은 마조(馬祖)선사의 독특한 일미(一味), 모든 조사스님네들이 토하지 못했던 독특한 일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밑으로 무수 도인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 법은 소인배(小人輩)는 안되고 신심(信心)이 있고 그릇이 큰 사람, 도(道)를 구하는 간절한 일념에 불타는 사람이 들을 것 같으면, 선지식의 한 마디에 마음이 척 열리게 되어 있다.
   지금 다들 참선한다고 앉아 있지만, 마음 한가운데는 야호(野狐)가 수십 마리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법문을 해 주어도 순수하게 들어가지 못한다. 이 대도(大道)를 배우는 이는 마음을 텅텅 비워서 선지식의 지도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그것이 그대로 자기 살림이 된다. 그래서 이 대도의 문에 들어 서려면 모든 지견(知見), 일체의 알음알이를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말을 이야기로 날려 버리지 말고 마음에 바로 새겨서 실천에 옮긴다면, 아주  큰 소득이 있을 것이다.
   
문 : 해운정사 법당에는 지금 주세불(主世佛)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 모셔져 있고, 양쪽으로 보현보살, 문수보살, 아미타불,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는데, 제가 듣기로는 이 주세불 때문에 해운정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왜 주불(主佛)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모셨습니까?
   그리고 오분향례(五分香禮)에서 영산(靈山)당시의 아라한(阿羅漢)에 대한 예는 올리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또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답: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세불로 모셨다고 하는데, 그 관세음보살 머리 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지 않느냐. 십대제자와 모든 보살들이 다 석가모니 부처님 응화신(應化身)이다. 교화하기 위한 방편 응화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화하는 분상에서 모든 응화신을 모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삼는 것 아니냐. 그것을 모르고, 못 보니까 다들 야호(野狐) 소견으로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그러는 게야.
   그리고 사판들이 예불문을 지을 때, 소승(小乘) 나한(羅漢)들을 조사(祖師)스님들 앞에 두었다. 앞에 둔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 그래서 차서(次序)에 맞지 않아서 내가 빼 버렸다. 그리고 소승들은 승가(僧伽)에 속하면 되는 것이다.
문 : 잘 알겠습니다.

문 :저는 새벽에 일어나면 바로 화두가 챙겨지고 그렇긴 합니다만, 공부를 하다보면 자꾸 여자 생각이 나게 됩니다. 항상 화두를 놓지 않고 열심히 참구하려고 노력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때도 화두를  챙기다가 잠이 드는데, 잡결이라든지 저 자신도 모르는 결에 여자 생각이 일어나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것만 끊으면  화두가 일념으로 나갈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이것을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답 : 젊었을 때는 여색에 시간을 다 뺏긴다. 그것은 과거 다겁다생(多劫多生)에 지어온 습기(習氣)로 인해서 사람이나 축생이나 다 그렇다. 중생(衆生)은 이 마음의 습기로 인해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서, 보면 마음이 동(動)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앞에서 내가 대발심자(大發心者)는 돈과 여색에 무심해야 된다고 했지. 이것은 철칙이다. 돈과 여색에 무심하지 않으면 이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다.
   이 몸뚱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피고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리 천하일색 미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생(生)을 그 허망한 것에 빠져서 오늘 날까지 성불(成佛)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금생에는 그러한 헛된 꿈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 허망한 몸뚱이에 초연하리라'는 작심을 하고 생각생각 화두참구에 열을 올려 봐라. 그렇게 해서 힘을 얻어 일념이 현전(現前)되기만 하면, 그때는 그러한 잡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게 된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 화두 참구하는데 있어서 힘을 못 얻었기 때문에, 과거생에 지어 왔던 습기(習氣)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오르는 것이지.
   그러니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진심(眞心)에서 우러나오는 화두를 챙기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렇게 한번 잘 해봐라.
   
문 : 제가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화두 두는 방법에서, 스님께서는 화두를 목전(目前)에다 두라고 하시는데, 상단전(上丹田)이나 하단전(下丹田)에 두면 안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 : 화두를 머리에다 두게 되면, 애를 써서 노력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기(氣)가 위로 올라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천근 만근이 되어 화두참구하는 데 큰 장애가 와버린다.
   그러나 힘을 다 놓아버린 상태에서 눈 앞 1미터 아래에다 화두를 두고 생각으로만 참구하면, 상기(上氣)되지 않고 편안하다. 또, 어떤 이들은 하단전(下丹田)에다 화두를 두고 참구하라고 가르치는데, 물론 앉아 있을 때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24시간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거든. 이 화두참구라는 것은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무르익어져야 일념(一念)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 사위의 가운데 익어지지 않으면 일념이 지속되지 않는다.  일념이 지속되지 않으면 깨달음이 올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한 고로 일상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목전(目前)에다 두고 참구(參究)하라는 것이다. 이 방법이 숙달만 되면 아주 간편하고 좋다. 그렇게 알고 실천에 옮겨 열심히 하도록 하고, 더 묻고 싶은 이는 또 아침으로 독참(獨參)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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