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公案]란 무엇인가?

崇山禪師.


  공안(公案)이란 관공서류나 공문서를 뜻한다. 옛날 중국에서 공문서의 사본을 뜰 때는 진본과 사본에 관인이나 도장이 반씩 찍히도록 했다. 또 이 도장을 비교하여 꼭 맞을 때에야 사본이 진짜임을 인정 받았다. 선가(禪家)에서도 공안은 똑 같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즉 한 질문에 대해 제자가 이해하면 반쪽인 스승의 이해와 비교하여 일치 되어야 한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똑같은 이해를 나누어 가질 때 "이심전심"이라고 부른다.

  시초에는 화두나 공안이라는 것이 없었다. 부처님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깨쳤던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욕망과 분노와 어리섞음이 고통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또 우리는 이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으며, 어떻게 열반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글자가 사용되지도 않았고 토론이나 논쟁도 없이 다만 홀로 명상하는 방법으로 전해졌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경전으로 남기기 위해 4차례에 걸쳐 큰 결집을 가졌다. 성경을 예수님이 쓰지 않았듯이 경전도 부처님이 직접 쓰지는 않았다. 바로 제자들의 말이다.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제자들은 부처님이 정말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던가에 대하여 논쟁을 많이 하였다.

  "부처님은 이것을 가르쳤다, 부처님은 저것을 가르쳤다......"

  이러다 보니 불교를 공부한다는 것이 참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고 여러 종파와 종단이 분규되어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약 1,500년 전쯤에 달마대사가 선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달마대사는 인도를 떠나 불교가 포교된지 300년이 된 중국땅으로 여행을 하였다. 달마대사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바른 이치는 모르는 채, 단지 기복신앙으로만 불교를 믿는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바른 이치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여기 달마대사와 양나라 무제와의 유명한 대화가 있다. 무제는 절을 많이 지어 보시하고, 경도 많이 편찬하고, 스님들께 공양도 크게하는 신심이 깊은 신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큰 가를 대사에게 물어 보았다.

  "저의 공덕이 얼마나 큽니까?"

  "전혀 공덕이 없습니다."  
 
  놀란 황제는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최고의 뜻(聖帝第一義)입니까?"

  "성스럽다고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廓然無聖).

  양무제는 당황하여 다시 물었다.
  "나와 마주보고 있는 당신은 누구 입니까?"

  "모릅니다." 

  이것이 달마 대사의 대답이었다.  이 대화를 마친 뒤 달마대사는 중국 북쪽땅으로 가서 유명하고 큰 사찰은 피하여 소림사 근처의 한 동굴에 은둔하며 면벽수도를 하였다. 9년이 지난 후에 혜가라는 승려가 달마대사를 찾아와 법을 구하였다.

  "저에게 법을 가르쳐 주십시요."

  달마대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비록 그대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그대는 나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오."

  이 말에 혜가는 자기의 팔을 잘라서 법을 구하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대사시여, 저의 마음이 괴롭습니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하여 주십시요!"

  "나에게 괴로운 마음을 가져 오너라, 그러면 편하게 해주리라."

  "그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말하였다.
  "내가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느니라."

  이 말에 혜가는 크게 깨닮음을 얻고 달마대사를 이어 2조(二祖)가 되었다. 이것이 이심전심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선(禪)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어 이어져 온 선은 육조 혜능대사 때에 이르러 또 다른 큰 전기를 맞는다.
                   
  육조대사는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가 인(因)을 심지 않는다면 과(果)를 얻지 않을 것이니 아무것도 만들지 마라."

  그는 이 단순한 가르침으로 아주 유명해 졌다.
한번은 육조스님이 휘날리는 깃발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두 승려 옆을 지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바람이 움직인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인다." 라고 주장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대사가 말했다.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움직이는 것은 바로 당신의 마음이오."

  여기에서 새로운 질문 즉, "무엇이 마음인가?" 라는 질문이 생겨 선승들의 큰 자극제가 되였다. 이러한 방식의 질문들은 자꾸 생겨났다.

  무엇이 인생인가?  무엇이 죽음인가?  무엇이 마음인가?

  이런 질문들이 공안이 되어서 참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활용이 되었다. 한번은 제자가 육조 대사를 찾아오자 대사는 이렇게 물었다.

  "어디로 부터 왔는가?  무슨 물건이 여기로 왔는가?"

  제자가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무엇일까? (이 뭣고?)  라는 공안이 생겨난 것이다. 또 부처님 께서 6년간 고행하며 알려고 하였던 바가 바로 이 질문이었다. 부처님, 달마대사, 그리고 육조대사가 똑같이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였고 똑같이 "모른다"고 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화두참선의 시초이다.

  후에 시대에 따라 여러 종파와 종풍이 생기고 거기에 따라 수없이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어떤 승려가 8조대사 마조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스님은 이렇게 답하였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卽心卽佛]."

  훗날 똑같은 질문을 똑같은 제자에게 다시 받자 마조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그때만 하여도 가르치는 방법이 아직 단순하였으나 점차 복잡한 방법이 생겨나고 개발되자 "법거량"이라는 말싸움까지도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벽암록이나 무문관 같은 유명한 공안집이 생겨난 것이다.
  선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신비스럽게 보이고 참선이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무 닭이 울고 돌 사자가 하늘을 난다." 혹은
  "토끼 뿔을 보았느냐?"

  그래서 선은 특별한 사람들 만의 것이 되고야 말았다. 이런 공안을 볼 때는 무의미한 이런 문자 속의 숨은 뜻을 파악해야만 한다. 이런 식의 방법이 계속되다가 다시 근본을 가르치는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봄이 오면 풀이 절로 돋아난다." 하는 답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선을 통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이 발달되었으나, 모두 진리를 가르치는 것들이다.  옛날 산에 사는 스님들은 평생 수행만 하면 되었다. 깨닫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이 사회와 관계없었기 때문에 진리를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필요성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과 사회에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선과 일상생활의 관계는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 여러분의 참된 자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올바르게 살아야만 한다. 그냥 모든 것을 놓고서 아무것도 만들지 말고, 매 순간 순간을 올바른 상황과 관계를 갖고 올바른 역할만을 행하면 된다. 그냥 하는 일 만을 하면 된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행한다면 이미 여러분은 깨달은 것이다. 또 만일 여러분이 이 말을 믿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면 올바른 깨달음과 올바른 역할이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선의 혁명이다.
                 
  과거에는 화두참선법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검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엔 우리들의 삶을 올바르게 만들기 위하여 화두를 사용한다. 이점이 과거에 화두를 사용해오던 방법과 달라진 점이다.  즉 답을 알아내던가 못 알아내든가는 염두에 두지 말고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 화두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쏟아라.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소리를 꿰뚤는다"는 의미이다.

  이 뜻은 여러분의 자성을 꿰뚫어 들으라는 의미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들을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또 그렇게 해야만 된다. 이것이 바로 보살도이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바로 우리의 수행이고 우리가 해야할 바이다

  올바른 수행이란 단지 견성하는 것 만을 뜻하지 않고 아울러 깨달은 사람이 할 바를 알아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답이 맞고 틀린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자신의 견해를 떨쳐버리면 마음이 허공같이 깨끗하게 된다. 그럴 때 여러분은 순간순간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마음에 거울 같이 반영되어 올바르고도 세밀하며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

  "화두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까?

  한 선사가 답하였다.
  "만 가지 질문은 한 가지 질문으로 돌아간다."

  한 가지 질문으로 수행한다는 의미는, 모르는 채 똑바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그냥 행하기만 해라. 만일 여러분이 화두에 집착한다면 "선병" 이라고 불리우는 커다란 병에 걸리게 된다. 공안, 즉 화두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여러분이 손가락에 집착한다면 달을 볼수가 없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옛날에는 수행한다고 하면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몇 년이든 공안과 씨름만 하고 사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수행법은 공안을 지닌 채 일상생활을 통해 어떻게 올바르게 행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할 때는 그냥 그것 만을 행하면 된다. 그렇게 행동할 때에 아무 생각이 없게 되고, 주체와 객체가 없어진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 이것이 올바른 화두수행법이다. 일상생활의 매 순간이 우리의 공안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의 혁명이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