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옹 스님

불교 글감 2009. 10. 12. 12:08

  근세불교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의 법맥 대신 400년간 면면히 내려온 독자법맥을 가진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白羊寺)의 근세 중시조는 만암(曼庵)스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백양사의 모든 스님들은 공식적으로 방장스님의 법제자가 되는 가풍 때문에 어른에 대한 효와 예의는 그 어느 절집보다 지극하다. 만암스님이 1955년 정화의 혼란기에 비구측이 종조를 태고보우에서 보조지눌로 바꾸려 하자 “환부역조(換父易祖)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대로하며 종정자리를 버리고 백양사로 내려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일찍이 학교와 회사를 세우며 교육과 사찰 자립에 열의를 보여온 만암스님의 정신은 ‘선교(禪敎)’를 함께 중시하고 호화불사를 자제하는 근검절약의 가풍과 일맥상통한다. 총림이면서도 방장스님의 거처인 염화실이 단독별채가 아닌 곳은 백양사 밖에 없을 정도다. 이러한 가풍은 만암스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이자 현 방장인 서옹스님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 고교때 간디 책 읽다가 출가 결심-

  ▲서옹석호(西翁石虎·1912~)스님의 출가와 일본유학=고고한 백학을 연상시키는 단아한 서옹스님은 충남 논산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유학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상순(李尙純)이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홀어머니와 지낸 서옹스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14세에 서울로 이사와 이듬해 월반해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입학과 동시에 홀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할아버지마저 뒤를 따르자 큰 충격을 받는다. 서옹스님은 “한꺼번에 몰아닥친 비운으로 어린 나는 하늘과 땅도 보이지 않고 막막할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스님의 숙부가 집안을 돌보았기 때문에 학업이나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에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인으로 유명했던 김교신(金敎臣) 선생과 위암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있었다. 서옹스님은 김교신 선생으로부터 간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련서적을 탐독하던 중 불교와 만나게 된다. “철학 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는 서옹스님은 “간디의 책을 읽다가 불교의 참맛을 알게 되었고, 결국 머리를 깎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매년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이었던 스님은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을 결심하지만 경성제대 예과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던 선생님과 숙부의 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럼에도 서옹스님은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대은스님에게 머리를 깎을 결심을 밝힌다. 대은스님은 “훌륭한 스님을 소개하겠다”면서 만암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권했다. 숙부는 스님의 출가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나 만암스님을 뵙고는 “조카를 잘 부탁한다”며 물러섰다고 한다.

  백양사에서 2년간 외전강사(영어 및 일반 사회학문을 가르치는 사람)를 하다가 오대산 방한암 스님 밑에서 다시 2년간 용맹정진한 스님은 1939년 일본 교토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님이 임제대학 졸업논문으로 쓴 ‘진실자기(眞實自己)’는 일본 불교학자 니시타 기타로와 다나베 하지메의 선(禪)학설의 오류를 지적해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의 대학자로 추앙받았던 히사마츠 신이치 박사(경도대 화엄학·작고)는 서옹스님에게 일본에 남을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귀국한다. 훗날 한국전쟁 소식을 들은 히사마츠 박사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옹스님만 살아준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속이 빈 사람이 겉을 치장 하는 법”-

  ▲수행과 깨달음=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교토 묘심사(妙心寺)에서 3년간 수행정진하다가 1944년 귀국한 서옹스님은 백양사와 목포 정혜원에서 잠시 주석하다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수행정진을 계속한다. 이때 서옹스님은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정진하던 성철스님과 처음으로 만나 평생 도반이 된다. 서옹스님은 “동갑이었던 성철스님이 간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며 뜻이 통하던 성철스님을 그리워했다. 이후 1963년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으로 취임하기까지 20년간은 제방선원을 떠돌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1965년 서울 천축사 무문관(無門關·6년간 밖에 나오지 않고 참선만 함) 초대조실이 되었고, 68년 묘심사를 다녀온 후부터 석호라는 법명 대신 현재의 법명인 서옹을 쓰기 시작한다.

  동화사 조실로 주석하던 1971년경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상왕은 위엄을 떨치며 소리치고 사자는 울부짖으니/번쩍이는 번갯불 가운데서 사와 정을 분별하도다/맑은 바람이 늠름하여 하늘과 땅을 떨치는데/백악산을 거꾸로 타고 겹겹의 관문을 벗어나도다’. 스님은 이후 백양사 운문선원, 봉암사 희양선원 조실로 잇달아 주석했고 1974년 고암스님 후임으로 5대종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서옹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서옹스님의 상좌인 정도스님은 “서옹스님은 결코 남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적이 없는데, 가장 심한 말이 ‘저 사람은 왜 저래’ 정도일 것”이라고 기억했다. 다만 시간을 지키지 않는데 대해서는 따끔하게 이르는 편이다. 13년째 서옹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시자 호산스님은 “운문선원에서 시봉할 때, 한번은 새벽 3시 예불시간에 늦잠을 잤더니 정확히 3시5분에 문앞에서 주장자로 댓돌을 쿵쿵 두드리시며 큰소리로 ‘호산! 호산!’ 하고 부르셔서 깜짝 놀라 기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부터 호산스님은 저녁에 잠들 때마다 물을 큰대접으로 마시고 자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그래야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라도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스님은 근검한 가풍에 따라 절대 치장하는 일에는 뜻을 두지 않는다. 다른 총림과 달리 방장실을 독채로 짓지도 않으며, 주지실 바로 옆방을 그대로 쓴다.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머무는 상도동 백운암도 70년대의 낡은 2층양옥이다. 오히려 주변에서 ‘누추하니 좀 수리를 하시라’고 권하면 “속이 빈 사람이 겉을 치장하는 법”이라며 물리친다. 대신 백양사의 손님방은 어느 절의 것보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지어놓았다.

-‘참사람 운동’ 시작 무차선대회도-

  ▲참사람 운동과 무차선 대회=1996년 정식으로 고불총림 인준을 받은 스님은 본격적으로 ‘참사람 운동’을 시작한다. 참사람 결사의 세가지 서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상무주(無相無住)의 참나를 깨달아 자비생활을 합시다. 둘째, 어디에도 걸림없이 자유자재하여 세계인류가 평등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역사를 창조합시다. 셋째, 자기와 인류가 생물과 우주가 영원의 유일 생명체이면서 각각 별개이므로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도와서 집착함이 없이 진실하게 알고 바르게 행하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세계를 건설합시다’

  1998년 백양사에서 86년 만에 처음으로 무차선대회(지위고하나 재가·출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법을 물음)가 열렸다. 한국선을 정립하고 국내외 학자들에게 조사선의 종지를 정확하게 알리는 자리였다. 이 무차선대회는 2년뒤에 다시 백양사에서 열렸고, 지난해에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한·중·일 국제무차선 대회’로 이어졌다. 92세의 나이에도 정정한 서옹스님은 제자들을 볼 때마다 “한번 법을 일러보라”며 부쩍 다그친다. 시간은 별로 많지 않은데 눈밝은 수좌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장성 백양사·이무경기자 lmk@kyunghyang.com/  2003. 3. 17     경향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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