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장사인 장원에게 답함


  그대가 결정코 이일을 궁구하고자 한다면 다만 항상 마음으로 하여금 활짝 비워서 사물이 오면 응함이 마치 사람이 활 쏨을 배움에 오래오래 하면 과녁을 맞히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달마(達磨)대사께서 이조 혜가(慧可)에게 말씀하시되 네가 다만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담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셨거늘 지금 사람들은 겨우 이 말을 듣고 문득 이리저리 꿰어 맞춰 미련스럽게도 지각없는 곳에서 억지로 스스로 막아 눌림으로써 마음이 담벽과 같게 되기를 바라니 조사가 “그릇(錯) 알면 어찌 방편인줄 알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암두(巖頭)스님께서 “겨우 이렇게 하면 곧 이렇지 못하니 옳은 글귀도 깎고 그른 글귀도 또한 깎아라.”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는 모습입니다.

  비록 새 새끼가 안에서 알을 부리로 쪼아 나오듯 부수고 불에 들어간 물건이 퍽하고 터지듯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또한 말에 움직임 당하지 않아, 달을 보고 손가락을 보지 않고 집에 돌아감에 길을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정식(情識)을 부수지 못하면 마음의 불꽃이(망상들이) 선명할 것이니 바로 이러한 때에 단지 의심하던 바 화두를 들되 예컨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여쭙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께서 답하시기를 없다>를 오로지 들고 깨어있을지언정 요리조리 (무언가를) 해보려 함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고 또한 선사가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또한 현묘(玄妙)한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말며 또한 ‘있다, 없다’하는 헤아림도 일으키지 말며 또한 진짜로 없다는 무(無)로 헤아리지도 말며 또한 일없는 갑(匣)속에 앉아있지 말며 또한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하는 곳에서 이해하지 마십시오.

  바로 마음 쓸 곳이 없어 마음이 갈 곳이 없을 때 공(空)에 떨어졌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곳이 곧 좋은 곳입니다.

  문득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나니 오직 숙세에 일찍이 반야의 종지를 심음이 깊으며 일찍이 무시광대겁(無始曠大劫)으로부터 참된 선지식을 받들어 섬겨서 바른 지견을 닦아 익혀 영식(靈識)가운데 둔 사람은 경계에 부딪히고 인연을 만나 현행(現行)하는 곳에서 문득 깨달으니 마치 만인(萬人)의 무리 속에 있으면서 자기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에 굳이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자연히 구하는 마음이 치달려 산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운문(雲門)스님께서 이르시되 “말할 수 없을 때 있다가 말하지 않을 때는 곧 없다 상량(商量)할 수 없을 때는 곧 있다가 상량하지 않을 때는 곧 없다.”고 하시고 또 스스로 들어 일으키면서 이르시되 “다시 일러라 헤아리지 않을 때 이 무엇인고?” 또 사람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또 스스로 이르시되 다시 “이 무엇인고?” 하셨습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선(禪)에 많은 길이 있어 혹은 한번 묻고 한 번 답하다가 끝에 한 글귀가 많음으로써 선으로 삼고 혹은 고인이 도에 든 인연을 가지고 머리를 맞대고 헤아리며 이르되 이 속은 비었고 저 속은 실다우며 이 말은 깊고 저 말은 묘하다하여 혹 대신 대답하고 혹 달리 대답하는 것으로 선을 삼고 혹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이해하여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며 만법(萬法)이 오직 식(識)에 있다하여 선으로 삼고 혹은 말없이 컴컴한 산 속 귀신굴에 앉아 있으면서 눈썹을 닫고 눈을 감는 것으로 위엄왕불(威音王佛) 저편(이전)과 부모가 낳지 않을 때의 소식이라고 일컬으며 또 묵묵히 항상 비춘다고 일러 선으로 삼으니 이와 같은 무리들은 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깨달음으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다고 하며 깨달음으로 사람을 속인다 하고 깨달음으로 (그냥 방편으로) 세워 둔 것이라고 하니 스스로 이미 일찍이 깨닫지도 못하고 또한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도 않습니다.

  내가 항상 납자들에게 일러 말하되 세간의 솜씨 좋은 재주와 예술도 만약 깨달은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묘함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데 다만 입으로 고요함을 말하여 곧 끝장을 내려 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를 파묻고 동쪽을 향해 달리면서 서쪽의 물건을 취하려고 함과 거의 비슷해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며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지니 이 무리들은 불쌍하다고 이름하겠습니다.

  경전(經典)에서는 그것을 일러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하며 불혜명(佛慧命)을 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천불(千佛)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가 통하지 않으니 비록 좋은 인(因)이나 도리어 나쁜 과보를 부르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 몸을 부숴 먼지와 같이 할지언정 끝내 불법으로 인정(人情)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결정코 생사를 대적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무명(無明)을 쳐부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절대로 삿된 스승이 순하게 어루만지며 동과(冬瓜)도장으로 인정함을 입고 곧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무리가 벼, 삼, 대나무, 갈대와 같이 많은데 그대는 총명하여 식견이 있어 반드시 이러한 나쁜 독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씀이 간절하여 빠른 결과를 구하고자하여 모르는 사이 저들의 오염을 만날까 두려워하여 붓 가는대로 말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눈 밝은 사람이 보면 한바탕의 허물일 것입니다. 제발 내 말을 들으십시오.

  다만 조주(趙州)의 <무(無)>자로 평상시 연(緣)을 만나는 곳에서 들되 끊어짐이 없게 하십시오.

  고덕이 말씀하시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 하셨으니 만약 말하여 하늘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더라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어리석고 미쳐서 바깥으로 내달리는 것이니 힘써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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