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손지현에게 답함


  받아보니 수정한 금강경(金剛經)을 나에게 보이니 즐거이 한번 수희(隨喜)함을 얻었습니다.

  근세 사대부가 그대와 같이 불경(內典)에 마음을 두고자 하는 자가 진실로 드뭅니다.

  뜻(意趣)을 얻지 못하면 이와 같이 믿을 수 없으며 경(經)을 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면 경의 깊고도 오묘한 뜻을 보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참으로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입니다.

  자세히 오래도록 음미(吟味)해보니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모든 성사(聖師)들이 번역함이 참됨을 잃고 본래의 진리를 어지럽히고 문장의 글귀의 보태고 뺌이 부처님의 뜻에 위배되었다고 꾸짖고 또 이르되 처음 지송(持誦)함으로부터 곧 잘못됨을 깨닫고 정본(正本:원본)을 구하여 그릇됨을 바로잡고자 하였건만 그러나 잘못 익혀 온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일률적으로 뇌동(雷同)하여 서울의 장경본(京師藏本)을 얻음에 이르러 비로소 의거함이 있다고 하며 다시 천친(天親), 무착(無着)의 논송을 자세히 비교해 참고하니 그 뜻이 들어맞아서 드디어 얼음이 녹듯이 의심이 없었다고 하며 또 장수(長水), 고산(孤山) 두 스님은 모두 글귀만 의지하고 뜻을 어겼다고 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대가 감히 이와 같이 비판한다면 반드시 육조시대의 번역한바 범본(梵本)을 자세히 보아 여러 스님들의 번역이 틀렸음을 다 얻어서야 비로소 얼음이 녹듯 의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미 범본(梵本)이 없는데 곧 자기 혼자의 견해로써 성인의 뜻을 없앤다면 또한 인(因)을 부르고 과(果)를 몸에 지닐 때 성인의 가르침을 훼방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짐은 논하지 않으려니와 아는 자가 그것을 보고 다시 그대가 여러 스님의 틀린 것을 점검한 것과 같이 본인에게 돌아올까 걱정합니다.

  옛사람은 “사귐이 얕은데 말이 깊은 것은 허물을 부르는 길이다.”고 하셨습니다.

  나와 그대는 평소에 잘 알지 못하지만 그대가 이 경(經)으로 인증(認證)을 구하여 온 세상에 유포(流布)하여 중생계에서 불종자(佛種子)를 심고자하니 이것은 일등의 좋은 일이요, 또 나를 유포시켜 줄 사람으로 여기고, 수정한 금강경으로 서로 마음이 계합함을 바라기 때문에 감히 답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에 청량국사(淸凉國師)가 화엄소(華嚴疏)를 지어 번역한 스님의 잘못됨을 바르게 하고자하였으나 범본(梵本)을 얻지 못하여 다만 경전에 끝에 썼을 따름이니 예컨대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가운데 이른바 『일체의 부처님이 끝없는 몸을 두시어 색상(色相)이 청정하여 모든 육도에 널리 들어가셔도 물듦이 없다.』고 한 대목에 청량국사께서 다만 이르시되 불부사의법품(佛不思議法品) 상권 제 3쪽 제17행에는 일체제불(一切諸佛)이거늘 구본(舊本)에는 ‘諸’자가 빠졌다고 하고 그 나머지 경본(經本)에 빠진 것도 모두 경전의 끝에 주(註)를 달았습니다.

  청량국사도 또한 성사(聖師)이나 첨가하고 뺌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감히 경의 끝에 쓴 것은 법을 아는 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 경전 중에 대유리보(大琉璃寶)라는 말이 있는데 청량국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마 패유리(?琉璃)를 구본(舊本)에 잘못 써넣은 것이라고 하시고 또한 감히 고치지 않고 다만 이와 같이 경의 끝에다가 주석을 달았습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 번역한 모든 스님들도 모두 얕은 지식의 인물이 아닙니다.

  번역하는 곳에서는 말을 번역하는 사람도 있으며 뜻을 번역하는 사람도 있으며 글을 다듬는 사람도 있으며 범어(梵語)를 증명하는 사람도 있으며 뜻을 바로 잡는 사람도 있으며 중국말과 범어(梵語)를 서로 비교하는 사람도 있으니 그대가 오히려 성인의 뜻을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하니 그대가 이미 범본(梵本)을 얻지 못하고 곧 망령되이 간삭(刊削)을 더하여 도리어 살펴보고 믿도록 함이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예컨대 장수(長水)스님을 논하여 글귀에만 의지하고 뜻에 어긋났다고 하니 범본의 증거도 없으면서 어찌 곧 결정하여 그를 잘못됐다고 하겠습니까? 장수스님은 비록 경전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다른 강사와 다르니 일찍이 낭야광조(瑯?廣照)선사를 참례하여 낭야스님께 수능엄경(首楞嚴經) 중에 부루나(富樓那)가 청정하여 본래 그러하거늘 어찌 홀연히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하고 부처님께 여쭌 뜻을 청익(請益)하니 낭야선사가 곧 소리 높여 “청정하여 본래 그러하거늘 어찌하여 홀연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라고 하시니 장수스님이 언하(言下)에 크게 깨친 뒤 곧 허물없이 지내면서 스스로 좌주(座主)라고 일컬으니 대개 좌주(座主)는 흔히 글줄을 찾고 먹 자국만 세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른 바 글귀에만 의지하고 뜻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니 장수스님은 깨달음이 없지 않으며 또한 글줄만 찾고 먹 자국만 세는 사람이 아닙니다.

  『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보리(阿?菩提)를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 경문(經文)의 큰 단원이 분명하여 이 글은 지극히 쉽고 평범하거늘 스스로 그대가 기특함을 구함이 너무 지나쳐서 다른 견해를 세워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따를 것을 구하고자 함입니다.

  그대가 무착론(無着論)에서 말한 『법신(法身)으로 응당히 여래를 봄이요, 상(相)이 구족했기 때문이 아니다.』를 인용하니 만약 이와 같다면 여래를 비록 응당 상(相)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지 않으나 마땅히 상이 구족됨이 인(因)이 되어 아뇩보리를 얻었으니 이런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시되 『수보리야 너의 뜻은 어떠한가? 여래는 상(相)을 성취한 것으로 아뇩보리를 얻었는가?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는 등의 것은 이 뜻은 상(相)이 구족함은 자체가 보리가 아님을 밝힌 것이요, 또한 상(相)이 구족한 것으로 인(因)으로 삼지 않으니 상(相)은 색(色)의 자성(自性)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論)의 큰 단락이 분명하거늘 스스로 그대가 잘못 보고 이해한 것일 따름입니다.

  색(色)은 상(相)의 연기(緣起)요, 상(相)은 법계(法界)의 연기(緣起)입니다.

  양(梁)나라 소명(昭明)태자가 “여래가 상(相)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뇩보리를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을 32분 중에 이 분(分)으로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으로 삼은 것은 수보리가 상을 갖추지 못하면 연기가 없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처음 어머니 태에 있을 때 곧 공(空)을 알아 다분히 연기상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편지의) 뒷부분에 인용한 공덕시보살론(功德施菩薩論)의 끝부분에 『만약 상(相)의 성취가 진실로 있다면 이 상(相)이 없어질 때 곧 단(斷)이라고 이름한다. 왜냐하면 나기 때문에 멸함이 있다』는 구절과 또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경에서 말한『무엇 때문인가? 일체법(一切法)은 생김이 없는 성품이므로 단상(斷常)의 두 변(邊)을 멀리 여의었으니 양변을 멀리 여윔은 법계의 모습이다.』는 구절은 성(性)을 말하지 않고 상(相)을 말함은 법계는 성품의 연기인 까닭이요, 상(相)은 법계의 연기이기 때문에 성품을 말하지 않고 상을 말한 것입니다.

  양나라 소명태자의 이른바 무단무멸분(無斷無滅)이 이것입니다.

  이 단원이 다시 분명하거늘 또 그대가 기특함을 구함이 너무 지나쳐 억지로 조목(節目)을 낼 뿐입니다.

  만약 금강경을 간삭(刊削)해야 한다면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대개 보았던 사람들이 각자의 견해에 따라 모두 간삭(刊削)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한퇴지(韓退之)가 논어(論語) 가운데 ‘畵’자를 가리켜 ‘晝’자라 하고 구본(舊本)이 틀렸다고 하니 한퇴지의 견식으로 고칠 수 있거늘 다만 이와 같이 글 가운데에 논함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또한 법을 아는 자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규봉밀(圭峰密)선사께서 원각소초(圓覺??)를 짓되, 밀(密)선사가 원각경(圓覺經)에서 깨달은 곳이 있어 감히 붓을 대니, 원각경 중에 『일체중생이 모두 원각(圓覺)을 증득했다』는 대목을 규봉선사는 ‘證’자를 고쳐 ‘具’로 하고 번역자의 잘못이라고 하되 범본(梵本)을 보지 못하여 다만 이와 같이 소(疎)에서 논(論)하고 감히 경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후에 늑담진정(?潭眞淨)화상께서 개증론(皆證論)을 짓고서 논(論)중에 규봉선사를 매우 꾸짖어 이르시되 ‘파계한 범부 누린내 나는 놈이다. 만약 일체중생이 원각(圓覺)을 갖추고 증득하지 못하면 축생은 영원히 축생이 되고 아귀는 영원히 아귀가 되어 모든 시방세계가 모두 구멍 없는 쇠방망인지라 다시 한사람도 참됨을 일으켜서 근원에 돌아감이 없으며 범부도 마땅히 해탈을 구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이미 원각을 갖추고 있어 또한 마땅히 증득함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대가 서울의 장경본으로 옳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본으로 근거를 삼고 있습니다.

  만약 서울장본이 지방 고을로부터 들여왔으며, 경산(徑山)의 두 장경(藏經)같은 것도 모두 조정의 전성기 때 주어서 이른 것이요, 또한 지방고을 경생(經生)들이 쓴 것이니 만에 하나 잘못이 있다면 또한 어떻게 고쳐 바로 하겠습니까? 그대가 만약 아상(人我)이 없어 반드시 나의 말이 지극한 정성이라고 여긴다면 반드시 고금(古今)의 큰 잘못됨에 빠져 있지 않을 것이며 만약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옳다고 하여 반드시 고쳐서 빼어 모든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함을 받고자 한다면 마음대로 간삭(刊削)하여 출판하십시오. 나도 다만 수희(隨喜)하고 찬탄하겠습니다.

  그대가 이미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경(經)을 가지고 인가(印可)를 구하니 비록 서로가 (얼굴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법으로 친함을 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많이 하여 당신의 마음을 거슬렸습니다.

  당신의 지성(至誠)을 보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마음에 두지 않고 (다 吐露했습니다.) 그대가 반드시 교승(敎乘)을 궁구하여 깊은 뜻에 이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한 이름난 강사(講師)를 찾아서 한마음 한뜻으로 그와 더불어 자세히 참구하여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하여야 일등으로 교망(敎網)에 마음을 두는 것이며 만약 무상(無常)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크지만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했다면 마땅히 한마음 한뜻으로 사람의 생사의 소굴을 부술 수 있는 본분(本分)을 밝힌 스승을 찾아 그분과 더불어 목숨을 건 공부를 해나가 홀연히 칠통(漆桶)을 타파하면 곧 깨닫는 곳입니다.

  만약 단지 이야기자루만 돕고자 하여 이르되 나는 모든 서적을 널리 읽고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 선(禪)도 내가 알고 교(敎)도 내가 안다하며 또한 이전의 모든 번역한 사람들과 강사들이 도달하지 못한 것을 점검하여 나의 능력과 나의 이해함을 드러내면 삼교(三敎:유?불?선)의 성인을 모두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인가를 구한 후에 간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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