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영시랑 무실에게 답함


  편지를 받으니 이 일대사인연을 궁구하고자 한다하니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갖추었다면 첫째로 급하게 구하지 마십시오. 급하면 더더욱 더디게 될 것입니다.

  또한 느슨하게도 하지 말지니 느슨하면 나태해질 것입니다.

  마치 거문고를 고르는 법과 같이하여 팽팽하고 느슨함을 반드시 알맞게 해야 비로소 곡조를 이루게 됩니다.

  다만 일상에 인연을 만나는 곳에 때때로 엿보아 잡되(화두를 들되) ‘내가 이렇게 사람과 더불어 옳고 그름과 굽고 곧음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은혜를 받기 때문이며, 결국은 어느 곳을 따라 흘러나오는고?’ 엿보아 잡아가다 보면(화두를 들다가 보면) 평소에 생소한 곳의 길은 자연히 익으리니 생소한 곳이 이미 익으면 익은 곳은 자연히 생소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익은 곳인고? 오음(五陰), 육입(六入),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와 이십오유(二十五有)와 무명(無明)으로 사량(思量), 계교(計較)하는 식심(心識)이 밤낮으로 또렷함이 아지랑이와 같아 잠시도 쉼이 없음이 이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오음, 육입등등이) 사람을 부려 생사에 떠돌게 하고 사람을 부려 좋지 못한 일을 하게 하니 위에서 말한 것들이 이미 생소하게 되면 보리, 열반(菩提涅槃)과 진여불성(眞如佛性)이 곧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날 때에 또한 드러났다는 생각도 없어야 합니다.

  고덕께서 계합해 증득함에 대해 곧 해석하여 말씀하시기를 “볼 때는 일천 해와 같아 모든 모양이 그림자를 피할 수 없고 들을 때는 깊은 계곡과 같아 크고 작은 소리가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은 일은 따로 구함을 빌리지 않고 다른 힘을 빌리지 않습니다.

  자연히 연(緣)을 만나는 곳에 자유자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음을 얻지 못했으면 장차 세간의 잡다함을 생각하는 마음을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돌이켜 두고 한번 사량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어떤 스님이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시되 없다.> 오직 이 한자에 어쨌든 무슨 기량이 있겠습니까? 안배(安排)해 보고 계교(計較)해 보십시오.

  사량(思量), 계교(計較), 안배(按排)는 둘만한 곳이 없으니 오직 가슴속이 답답함을 느낄 것이니 마음에 번민하는 때가 곧 좋은 시절이니 제 8식이 서로 번갈아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를 느끼면 반드시 놓아버리지 말고 오직 이 <무(無)>자 위에 나아가 들어 보십시오. 들다가 보면 설은 곳은 자연히 익게 되고 익은 곳은 자연히 설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총림 가운데 한 종류의 삿된 말을 부르짖어 종사가 된 자들이 있어 배우는 자에게 일러 말하되 오로지 다만 고요함만 지켜라 하니 지키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고요한 것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반대로 말하되 고요한 것이 기본이라고 하고 도리어 깨달음이 있는 것을 믿지 않고 깨달음을 지엽적인 것이라고 이르며 다시 어떤 스님이 앙산(仰山)스님께 여쭙기를 “지금 사람도 또한 깨달음을 빌립니까?” 앙산스님께서 이르시되 “깨달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음을 어찌하랴.”라고 하셨으니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꿈을 말할 수 없겠습니다.

  곧 실법(實法)이라는 알음알이를 내어 깨달음이 이구(二句)에 떨어진다고 하니 앙산스님께서 스스로 배우는 자를 경책하여 깨닫게 한 말이 매우 간절하여 이르시되 “지극한 이치를 궁구함은 깨달음으로 법칙을 삼는다.”고 하신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곳에다 두겠습니까? 앙산스님께서 후학에게 의심하게 하고 그르치게 해서 이구(二句)에 떨어져 있게 하고자 했다함은 옳지 않습니다.

  조합사(曺閤使)가 또한 이 일에 마음을 두었으되 그가 삿된 스승에게 그르친바 될까 두려워하여 근래에 또한 이 편지와 같이 많은 말을 써 주었는데 이 사람의 총명식견(聰明識見)이 모두 크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곳이 있어 결코 방편의 말을 그릇 알아 실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킴에 이르지 않을 것이지만 다만 내가 그와 더불어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사로이 걱정함이 지나쳤을 뿐입니다.

  들으니 그대가 또한 그와 더불어 수행하는 도반이라고 하니 붓을 잡은 차에 나도 모르게 말을 하니 일없이 서로 만날 때에 시험 삼아 그에게 물어 편지를 가져 한 번 보면 바야흐로 내가 확신함이 얼굴만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서로의 뜻이 서로 맞음에 있으며 또한 세력과 이익으로 사귀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한 장을 적고 종이가 다하여 또 한 장을 보태어 다시 글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 편지도 또한 이 앞의 편지와 같이 이 가운데 사람(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이가 많은데 (나를 등용함은) 무슨 연유인가라고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말한다면 좋은 일이 눈앞에 있더라도 반드시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가 비록 간략한 것 같으나 또한 기감(機感)이 서로 맞아서 또한 나도 모르게 답장을 하니 그대가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벼슬을 하리라 여겨집니다.

  일상의 인연을 만나는 곳에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베풀어서 임금의 어진 사람을 구하여 천하를 편하게 할 뜻에 보답한다면 참으로 그 알아주신바(임금이 당신을 알아주어 등용한 것)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갖가지를 감내(堪耐)하여 시종(始終) 오직 지금과 같이 공부해 간다면 불법과 세간법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전쟁하고 한편으로 밭을 갈면서 오래오래 하여 익어 순일해지면 일거양득(一擧兩得)하리니 어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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