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누출밀 중훈에게 답함(2)


  일상의 공부를 앞의 편지에서 이미 말함이 적지 않으니 단지 전과 같이 바꾸거나 움직이지 않고 사물이 오면 그것과 더불어 응하면 자연히 사물과 내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고덕(古德)께서 말씀하시기를 “걸림이 없이 가고 머무르는데 맡기고 고요히 비춰 원천을 깨달을지니 깨달음의 경지를 말해도 사람에게 보일 수 없고 도리를 말해도 깨닫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증득하고 스스로 얻은 곳은 잡아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몸소 증득하고 얻은 자라야 대략 눈앞에 조금만 드러내면 서로가 곧 묵묵히 계합(契合)할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이로부터 사람의 속임을 받지 않아 공부함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니 대체적인 것이 이미 바르고 칼자루를 이미 얻었으니 마치 소 잘 치는 사람과 같아 고삐를 항상 손에 쥐고 있으면 어찌 다른 사람의 벼 싹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고삐를 놓아버려 콧구멍에 잡을 곳이 없으면 평원(平原)의 얕은 풀밭에 마음대로 뛰어 놀 것입니다.

  자명(慈明)노인께서는 “사방(四方)에 놓아 울타리를 막지 말고 팔방(八方)에 걸림이 없게 하여 마음대로 놀게 하라. 거두고자하면 다만 고삐를 다스리는데 있다.”고 하시니 이와 같지 못하면 마땅히 고삐를 꽉 잡고 또 순하게 쓰다듬어 따르게 할지니 공부가 이미 익으면 자연히 뜻을 써서 막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공부는 급하게 하지 말지니 급하게 하면 곧 조급히 움직일 것입니다.

  또한 느슨하게도 해서는 안되니 느슨하면 흐리멍텅해 질 것입니다.

  생각을 잊거나(忘懷) 뜻을 둠(着意)이 모두 어긋나니 비유하자면 칼을 휘둘러 허공에 던짐에 미침과 미치지 못함을 논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에 엄양(嚴陽)존자가 조주(趙州)스님께 여쭙기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주선사께서 이르시기를 “놓아버려라.” 엄양스님이 이르되 “한 물건도 이미 가져오지 않았는데 놓아버려라 하심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가 이르시되 “놓지 못하겠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엄양스님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았으며 또 어떤 스님이 고덕께 여쭙기를 “학인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고덕이 이르시되 “나도 어찌할 수 없도다.” 그 스님이 이르되 “배우는 사람은 배우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거니와, 화상(和尙)께서는 대선지식인데 무엇 때문에 또한 어찌할 수 없습니까?” 고덕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약 어찌 할 수 있다면 곧 너의 어찌할 수 없음을 잡아 물리쳤으리라.” 그 스님이 즉시 크게 깨치니 두 스님의 깨달은 곳이 곧 그대의 깨치지 못한 곳이며 그대가 의심하는 곳이 곧 두 스님이 여쭌 곳입니다.

  법은 분별을 따라 생겨 또한 분별을 따라 없어지니 모든 분별법(分別法)을 없애면 법에는 나고 없어짐이 없습니다.

  자세히 온 편지를 보니 병이 이미 다 물러가고 별다른 증후도 또한 생기지 않는다고 하니 큰 단락(段落)이 서로 가까우니 또한 점점 힘을 덜 것입니다.

  청컨대 다만 힘 들린 곳에 나아가 놓아 걸림이 없게 하면 홀연히 새 새끼가 안에서 알을 부리로 쪼아 나오듯 부수고 불에 들어간 물건이 퍽하고 터지듯 끊어 곧 마치리니 제발 힘쓰십시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