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서현모 추산에게 답함


  그대가 자주 편지를 부쳤기에 내가 생각해보니 (그대의 목적은) 물소(마음)를 조복하고자 하며 원숭이(식심)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래 총림(叢林)을 돌아다녀 흡족히 선지식을 찾아뵙는데 있지 않고 다만 일언일구(一言一句)에 바로 끊어 알아차림을 귀하게 여깁니다.

  말을 돌리지 않고 사실에 의거하여 논하면 그 사이에는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득이하여 바로 끊는다고 말하지만 이미 굽어버린(어긋난) 것이며 알아차렸다 말함도 이미 어긋난 것이거늘, 하물며 가지와 넝쿨을 끌어다가(지엽적인 것) 경(經)을 들먹이고 이(理)와 사(事:현상계)를 말하여 구경(究竟)에 이르고자 합니까? 고덕(古德)께서는 “다만 털끝만큼이라도 있어도 곧 번뇌다.”라고 하셨으니 물소(마음)을 조복하지 않으며 원숭이(식심)를 죽이지 않으면 비록 항하사(恒河沙)와 같이 많은 도리를 말하더라도 전혀 나에게 조금도 관계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음도 또한 밖의 일이 아닙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강서(江西)노숙께서 “말할 수 있더라도 또한 너의 마음이요 말할 수 없음도 또한 너의 마음이다.”라고 하셨으니 결정코 바로 끊어 짊어지고자 할진대 부처와 조사를 보기를 살아있는 원수와 같이 해야 비로소 조금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오래되면 애써 마음을 일으켜 깨달음을 구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저절로 조복하며 식심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오로지 평소에 마음과 식심(識心)이 모여 머물 수 없는 곳과 취할 수 없는 곳과 버릴 수 없는 곳에 <어떤 스님이 운문(雲門)스님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마른 똥막대기니라>는 화두를 드십시오.

  들 때 평소의 총명하고 영리하여 사량하고 헤아리지 말지니 마음을 헤아리고 사량하면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가 먼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량(思量)하지 않고 계교(計較)하지 않고 마음에 헤아리지 않음이 곧 옳은 것입니까? 돌(咄
) 다시 이 무엇인고? 그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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