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이보문 무가에게 답함


  저번에 편지를 받아보니 근성이 어리석고 둔하여 힘써 수행하여 지니되 끝내 깨닫는 방법을 얻지 못했다고 하니 내가 근래 쌍경(雙徑)에 있으면서 부계신(富季申)이 물은 바에 답한 것이 바로 이 물음과 더불어 같습니다.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는 결코 둔하지 않으니 다시 어느 곳에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합니까? 사대부가 이 도를 배움에 마땅히 어리석고 둔한 것을 빌려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음에 집착하여 스스로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이른다면 혼둔(昏鈍)의 마장(魔障) 걸리는 바가 될 것입니다.

  대개 평소에 지견(知見)이 많아 깨달아 증득함을 구하는 마음이 앞에 있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자기의 바른 지견이 드러날 수가 없는데 이 장애도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다른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둔한 것을 아는 주인공입니다.

  단엄(瑞巖)화상이 평상시 방장실에 계시면서 스스로 불러 이르되 “주인공아”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성성하라”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다른 때에 다른 사람의 속임을 받지 말라” 또 스스로 대답하여 이르되 “예 예”하였습니다.

  옛부터 다행히 이러한 모범이 있었으니 마음껏 이 속에서 <이 뭐꼬?>하고 들어 보십시오.

  다만 이렇게 드는 것도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일뿐입니다.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자도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곧 이보문의 본분자리입니다. 이것이 내가 병에 대해 약을 주는 것입니다.

  부득이하여 간략히 거사를 위해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는 길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곧 죽은 말을 인정하여 진실로 본분자리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식신(識神)을 알아 자기로 삼는 것이니 더욱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사(長沙)화상께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함은 다만 예전의 식신(識神)때문이니 무량한 겁으로부터 생사의 근본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부른다.”고 하셨으니 앞에서 말한 어리석고 둔함을 빌려 들어간다 함이 이것입니다.

  다만 이 어리석고 둔함을 아는 것이 필경에 무엇인지를 살펴볼지니 다만 이 속에서 살펴볼지언정 뛰어넘어 깨달음을 구하지 마십시오.

  들다가 보면 문득 크게 깨달을 것입니다. 이외에 말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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