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왕교수 대수에게 답함


  그대는 헤어진 후 일상생활 가운데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일찍이 이성(理性)에서 재미를 얻거나 경(經)에서 재미를 얻거나 조사(祖師)의 언구(言句)에서 재미를 얻거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발을 들고 걷는 곳에서 재미를 얻거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곳에서 재미를 얻으면 모두가 일(깨닫는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만약 바로 쉬고자 할진대 마땅히 앞의 재미를 얻은 곳에서 전혀 다른 것은 관여하지 말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없는 곳에 시험 삼아 뜻을 두어 보십시오.

  만약 뜻을 둘 수 없으며 잡거나 더듬을 수 없을진대 점점 잡을만한 자루(단서)가 없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치의 길과 뜻의 길에 심의식(心意識)이 전혀 행해지지 않음이 마치 흙, 나무, 기와, 돌과 비슷할 때 공(空)에 떨어졌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본인의 신명(身命)을 바치는 곳이니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대개 총명의 장애를 입어 이 때문에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아 어떤 경계를 만나면 막히게 되니 중생은 무시(無始)이래로부터 심의식(心意識)의 부림을 당해 생사에 떠돌아 다녀 자재함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생사(生死)에서 벗어나 쾌활한 놈이 되고자 할진대 마땅히 한칼에 두 동강내어 심의식(心意識)의 길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약간 상응함이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영가(永嘉)스님께서 “법재(法財)을 감하고 공덕을 없앰은 이 심의식(心意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어찌 사람을 속이겠습니까!

  얼마 전에 편지를 받으니 그 가운데 가지가지의 마음 쏠린 것들이 모두 내가 평소에 꾸짖던 병입니다.

  이러한 일을 알진대 다 날려 생각 밖에 두고 또 근거도 없고 잡거나 더듬을 수 없는 곳과 재미가 없는 곳에서 시험 삼아 공부를 지어보되 <어떤 스님이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기를 없다>를 들어 보십시오 평소에 총명한 사람은 막 들어 일으키는 것을 듣고 곧 심의식(心意識)으로 이해하여서 널리 헤아려 끌어다가 증거로 삼아 말하고자 하니 인가하는 곳은 끌어다가 증거를 댐을 용납하지 않으며 널리 헤아림을 용납하지 않으며 심의식(心意識)으로 앎을 용납하지 않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끌어 증거로 대고 널리 헤아려 알았더라도 모두 촉루(??: 8식) 이전의 정식(情識)의 일입니다.

  생사의 언덕에는 결코 힘을 얻지 못합니다.

  지금 온 천하에 선사(禪師), 장로(長老)라고 일컫는 자들이 분명히 알았다고 하는 것들이 조금 전에 말한 소식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 가지가지 삿된 견해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밀(密)수좌는 그와 함께 평보융(平普融) 회하(會下)에 있을 때 서로 모여 모두 보융(普融)의 깊은 뜻을 다 얻어 그는 스스로 안락(安樂)으로 삼으나 도달한 바가 또한 그대의 편지 가운데 소식을 벗어나지 않더니 지금 비로소 그릇됨을 알고 따로 이 안락처를 얻고 비로소 내가 추호(秋毫)도 그를 속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지금 특별히 그로 하여금 가서 당신을 보게 하니 일이 없을 때에 시험 삼아 그로 하여금 말해보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대의 뜻과 계합합니까? 80 먹은 늙은이가 과거시험장에 들어감은 진실로 정성스러울 것이니 아이들 장난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생사(生死)가 닥침에 힘을 얻지 못하면 비록 말하여 분명히 알고 이해하여 낙처(下落)가 있으며 인증(引證)하여 차별이 없더라도 모두가 귀신집의 살림살이입니다.

  나에게는 조그만 일도 전혀 관계되지 않습니다.

  선문(禪門)의 가지가지 차별의 다른 견해는 오직 법을 아는 자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법(大法)을 밝히지 못한 자는 종종 대개 병으로 약을 삼으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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