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종직각에게 답함


  편지를 받아보니 연(緣)을 만나 날마다 차별경계를 겪되 일찍이 불법 가운데 있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일상의 움직이는 가운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로 번뇌(情塵:육근육진) 을 부숴 제거한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이 공부 할진대 마침내 깨달음을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근본자리에서 비추어 보십시오.

  차별경계는 어느 곳으로부터 일어나며 움직이며,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어떻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로 번뇌(情塵)를 부숴 제거하며 번뇌를 제거함을 아는 자는 또한 누구인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중생이 전도되어 스스로를 미혹하게 하고 사물을 쫓는다.”고 하셨으니 사물은 본래 자성이 없건만 자기를 미혹하게 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쫓을 따름이며 경계는 본래 차별이 없거늘 스스로 미혹하게 한 자가 스스로 차별할 뿐입니다.

  이미 날마다 차별경계를 겪는다 하고 또 불법 가운데 있다고 하니 이미 불법 가운데 있다고 하면 차별경계가 아니요, 이미 차별경계에 있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하나를 잡고 하나를 버리면 어찌 깨달을 기약이 있으리요?

  광액도아(廣額屠兒)가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있으면서 짐승 잡는 칼을 놓고 선 자리에서 곧 성불하였으니 어찌 허다히 말을 많이 하리요?

  일상에 연(緣)을 만나는 곳에 곧 차별경계(差別境界)를 겪음을 느낄 때 다만 차별하는 곳에서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들지언정 부숴 제거하겠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번뇌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차별(差別)이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불법(佛法)이란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만 드십시오.

  다만 <무(無)>자만 들지언정 또한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에 깨닫기를 기다린다면 경계가 차별이며 불법이 차별이며 번뇌(情塵)가 차별이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가 차별이며 끊어짐이 있는 곳이 차별이며 끊어짐이 없는 곳이 차별이며 번뇌를 만나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워 편안하지 못하는 곳이 차별이며 허다한 차별을 아는 것도 차별이니 만약 이 병을 없애고자 한다면 다만 <무(無)>자만 들며 다만 광액도아가 칼을 놓고 이르되 나는 천불(千佛) 중(中) 하나다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를 보십시오.

  만약 허(虛)와 실(實)을 헤아린다면 또한 차별경계에 들어가게 되니 한 칼에 두 동강내어 앞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만 못하니 앞뒤를 생각함도 또한 차별입니다.

  현사(玄沙)스님께서 “이 일은 기약할 수가 없다. 마음과 생각의 길이 끊어짐은 장엄(莊嚴)함에 말미암지 않는다. 본래 참되고 고요하여 움직이며 쓰고 말하고 웃으매 그 곳을 따라 분명하여서 다시 모자람이 없거늘 지금 사람들은 이 가운데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이 스스로 일을 겪고 경계를 만나 곳곳마다 물들고 제각기 얽히어 매이나니 비록 깨닫더라도 잡다한 경계가 어수선하며 이름과 모양이 실답지 않아 곧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가다듬어 일을 거두어 공으로 돌이키려고 하여 눈을 닫고 눈동자를 감추고 생각이 일어남을 따라 자주 부숴 제거하며 미세한 생각이 막 일어나면 곧 막아 누르나니 이와 같은 견해는 곧 공에 떨어져 죽은 외도이며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며 어둡고 막막하여 느낌도 앎도 없나니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과 같아 한갓 스스로 속일 따름이다.”라고 하셨으니 그대의 온 편지에 운운(云云)함이 모두가 현사스님께서 꾸짖은 바의 병이며, 묵조의 삿된 스승이 사람을 매장하는 구덩이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화두를 들 때에 모두 허다한 기량을 쓰지 말고 오로지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곳에 화두가 끊어짐이 없게 하며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운 곳에 분별을 내지 마십시오.

  화두를 들어봄에 이치의 길도 없고 재미도 없어 마음이 애타고 갑갑함을 느낄 때가 곧 본인이 신명(身命)을 바치는 곳이니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곧 물러서는 마음을 내지 말지니 이와 같은 경계가 바로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소식입니다.

  지금 묵조의 그릇된 스승들은 오로지 말이 없는 것으로 지극한 이치로 삼아 위엄나반(威音那畔) 전의 일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또한 공겁이전(空劫已前)의 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깨달음의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속인다하고(깨달음이 있다고 함은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깨달음으로 이구(二句)라고 하며 깨달음으로 방편의 말이라고 하며 깨달음으로 끌어들이는 말이라고 하니 이와 같은 무리는 다른 사람을 속이며 스스로 속이며 다른 사람을 그르치며 스스로도 그르치는 것이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상의 생활 가운데 차별경계를 겪으면서 힘을 드는 것을 느끼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

  힘을 얻은 곳이 곧 지극히 힘을 든 곳이니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힘을 써서 지탱하면 반드시 삿된 법이지, 불법이 아닙니다.

  오로지 장원심(長遠心)을 갖추고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지어 가십시오.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마음이 갈 바가 없어져 홀연히 꿈을 꾸다가 깨어남과 같으며 연꽃이 핀 것과 같으며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보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는 자연히 한 덩어리를 이룰 것입니다.

  오로지 일상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 단지 이 <무(無)>자를 들되 깨닫고 깨닫지 못함과 뚫고 뚫지 못함을 관여하지 마십시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다만 일개 무사인(無事人)이며 모든 조사(祖師)스님도 또한 단지 일개 무사인(無事人)입니다.

  고덕께서는 “단지 事(일체 차별의 모양 곧 현상계)에서 무사(無事)함을 통달한다면 색을 보거나 소리를 들음에 귀머거리일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며 또 고덕(古德)이 말씀하시되 “어리석은 사람은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없애지 않으나,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없애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모든 곳에 무심(無心)하다면 가지가지 차별경계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지금 사대부는 대개가 성질이 급하여 곧 선(禪)을 알고자 하여 경전과 조사의 언구(言句)에서 널리 헤아려 설(說)하여 분명히 밝히고자 하나 분명히 밝히는 것이 도리어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일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무(無)>자를 투과한다면 분명히 밝히고 밝히지 못함을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대부로 하여금 놓아 둔하게 하라함은 곧 이러한 도리입니다.

  잘못된 방(鈍?)으로 장원(狀元)이 됨은 나쁜 것이 아니나 단지 백지(白紙)를 낼까 두려워 할 뿐입니다. 한번 우스개 소리를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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