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왕장원 성석에게 답함(2)


  제(왕장원)가 모든 반연을 쉬고 평소에 다만 이와 같이 번뇌하고 근심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니 그대의 분상(分上)에 모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으면서 천만가지를 갖추었다고 이를만합니다.

  만약 이 문중에 몸을 돌이켜 전심전력한다면 어찌 다만 허리에 십만관(十萬貫)을 차고 학을 타며 양주(楊州)에 오르는 것뿐이겠습니까?

  옛날에 양문공대년(楊文公大年)이 30세에 광혜연공(廣慧璉公)을 보고 가슴에 걸린 물건을 제거하고 이후로부터 조정에 있거나 마을에 머묾에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節槪)를 공명(功名)에 움직이는바 되지 않고 부귀의 빼앗기는바 되지 않고 또한 공명과 부귀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가 있는 곳에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조주(趙州)스님께서 “모든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부림을 당하나 나는 종일토록 부린다.”고 하셨으니 조주스님의 이와 같은 말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대개 배움과 도를 닦음이 하나인데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배움을 삼고 격물(格物), 충(忠), 서(恕)와 일이관지(一以貫之)같은 것을 도로 삼고 있어 다만 수수께끼(博謎子)와 같고 또 여러 맹인(盲人)이 코끼리를 만짐에 각각 다른 부위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사유(思惟)하는 마음으로 여래원각경계(如來圓覺境界)를 헤아려 잰다면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으니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당할 때에 전혀 힘을 얻지 못함은 모두가 이것 때문입니다.

  양자(楊子)는 “배움이란 성품을 닦는 방법이니 성품이 곧 도다.” 했으며 부처님께서는 “성품은 무상도(無上道)를 이룬다.”고 하셨으며 규봉(圭峯)선사는 “의(義) 있는 일을 함은 깨달은 마음이요, 의(義) 없는 일을 함은 광란(狂亂)하는 마음이니 광란은 정념(情念)에 말미암아 생긴다. 목숨이 끝날 때에 업에 끌림을 당하게 된다. 깨달음은 정념(情念)에 말미암지 않으니 죽을 때 업을 굴리나니 이른 바 의(義)라는 것은 의리(義理)의 의(義)요, 인의(仁義)의 의(義)가 아니다.”고 하셨으니 지금 보면 이 늙은이도 또한 허공을 쪼개 두 쪽을 만듦을 면치 못했습니다.

  인(仁)이란 곧 성품(性品)의 인(仁)이요 의(義)란 곧 성품의 의(義)요, 예(禮)는 곧 성품의 예(禮)요, 지(智)는 곧 성품의 지(智)요, 신(信)은 곧 성품의 신(信)이라. 의리(義理)의 의(義)도 또한 성품이니 의(義) 없는 일을 함은 곧 이 성품을 거역하는 것이요, 의(義) 있는 일을 함은 이 성품을 따르는 것이나 따르고 거역함은 사람에게 있음이요, 성품에 있지 않으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성품에 있음이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있으나 성품에는 없습니다.

  만약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어진 사람에게 있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있지 않는다면 성인의 도는 가리고(揀擇) 취하고 버림이(取捨) 있어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림에 땅을 골라 내림과 같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르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성품에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으며 어질고 어리석고 따름과 거역함은 사람에게 있지 성품에 있지 않습니다.

  양자(楊子)가 말한 성품을 닦는다는 것은 성품 또한 닦을 수가 없으니 또한 어질고 어리석고 따름과 거역함일 뿐이며 규봉(圭峯)선사가 말씀한 깨달음과 광란함이 이것이며 조주(趙州)스님이 말씀하신 온종일 부림과 온종일 부림을 당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성품이 일어나는 곳을 안다면 격물(格物), 충(忠), 서(恕), 일이관지(一以貫之)도 그 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

  승조법사(僧肇法師)가 이르시되 “하늘의 일을 모두 알고 인간의 일을 모두 아는 자가 어찌 하늘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배우고 도를 닦음은 하나입니다.

  대개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름을 구하지도 않고 공적(功績)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봄이 초목(草木)에 행해지는 것과 같이 이 성품을 갖춘 자는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각각 서로 알지 못하나 그 근기와 성품을 따라 크고 작음, 네모와 둥글고, 길고 짧음, 혹은 푸르고 혹은 누렇고 혹은 붉고 혹은 푸름과 혹은 냄새나고 혹은 향기로움이 동시에 피어나니 봄이 크게 하고 작게 하며 네모지게 둥글게 하며 길게 하며 짧게 하며 푸르게 하며 누렇게 하며 붉거나 푸르게 하며 냄새나거나 향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이 인연을 만나서 피어났을 뿐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은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할진대 마땅히 시절인연을 보라. 시절이 만약 이르면 그 이치는 자연히 드러난다.”고 하셨으며 또 회양(懷讓)선사께서 마조(馬祖)스님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네가 마음법문(心地法門)을 배움은 종자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要諦)를 말함은 저 하늘의 혜택에 비유할 수 있다. 너의 인연이 맞기 때문에 곧 마땅히 그 도리를 볼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르시되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름을 구하지도 않고 공적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다만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품을 보아 도를 이루게 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무구노자(無垢老子)가 말하기를 도가 한 겨자씨만큼 있으면 겨자씨만큼 무겁고 도가 천하에 있으면 천하만큼 무겁다함이 이것입니다.

  그대는 일찍이 무구(無垢)의 마루에는 올랐으나 아직 그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겉은 보고서 그 속은 보지 못했습니다.

  백년의 세월이 단지 한 찰나간에 있으니 찰나간에 깨달아 버리면 위에 말한 것들이 모두가 실다운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깨달으면 사실이라고 여김도 또한 나에게 있고 사실이 아니라고 여김도 또한 나에게 있으니 마치 물위의 조롱박이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도 항상 안정되지 않아서 만지면 곧 움직이며 누르면 곧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으니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법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조주(趙州)스님의 <구자무불(狗子無佛性)> 화두를 그대는 마치 사람이 도적을 잡음에 이미 소굴은 알았으나 단지 아직 잡지 못함과 같으니 청컨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금도 (화두가) 끊어짐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

  수시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과 책을 보고 사서(史書)를 읽는 것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닦는 것과 웃어른을 시봉하는 것과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죽을 먹고 밥을 먹는 가운데 공부를 지어간다면(일상생활 하는 가운데 화두의 의심을 놓지 않는다면) 홀연히 몸뚱이를 잊게 되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