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니(僧尼)란 무엇인가?

  중이라 함은 일체 명상법이 생기기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중이라 하니, 만유(萬有)의 주인이요 천상 인간의 스승이 바로 중인 것이다.

  수행인인 중은 부모 처자와 일체 소유를 다 버림은 물론 자신까지도 버려야 하나니라.

  중은 운명의 지배도 아니 받고, 염라국에도 상관이 없어야 하며, 남이 주는 행(幸)·불행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나니라.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성품이 흰 연꽃 같이 되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니라.

  짧은 인생을 위하여 하는 세속 학문도 반평생을 허비해야 하거든 하물며 미래세가 다함이 없는 앞길을 개척하려는 그 공부를 어찌 천년을 멀다 하며, 만년을 지루하다 할 것인가?

  생사윤회에 소극적인 학교교육도 필요를 느끼거든, 하물며 생사윤회를 영원히 끊고 참된 인간을 완성시키는 참선교육은 참을 필요하다. 전 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니라.

  세상사람은 유위(有爲)로 법을 삼지만 중은 무위(無爲)로 법을 삼나니라.

  세상 사람은 무엇이든지 애착심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중은 무엇이든지 애착심을 끊고 일을 하나니, 부처님이나 조사에게까지도 애착심을 가지지 말 것이니라.

  세상에서는 혈통으로 대를 이어가지만 중은 자기를 깨달은 정신 곧 도(道)로 대를 이어 가는데, 세상에서도 조상의 제사를 끊게 되면 그에서 더 큰 죄가 없다는데, 불자(佛子)가 되어 중으로 부처님 법을 자기 대에 와서 끊는다면 그 죄를 어디에 비할 것인가.

  예전에는 항간의 부녀자 중에도 불법을 아는 이가 있어 종종 중을 저울질하는 일이 있었건만 지금은 민중을 교화할 책임이 있는 중이 도리어 불법을 모르니, 어찌 암흑시대라 하지 않을 것이며, 시대가 이토록 캄캄한데 민중이 어찌 도탄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불교의 흥망이 곧 인류의 행(幸)·불행이니라.

  언제나 불교의 행운과 함께 세상에 평화가 동행해 오게 되나니라.

  공부하는 스님의 누더기는 임금의 용포(龍袍)로도 능히 미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임금의 용포 밑에서는 갖은 업을 짓게 되지만 중의 누더기 밑에서는 업이 녹아지고 지혜가 밝아지나니라.

  중으로서 속인의 부귀를 부러워하거나 외로워하거나 설움과 한이 남았다면 게서 더 부끄러운 일이 없나니라.

  이 우주 전체가 곧 나인 것을 깨달아 체달(體達)된 인간을 중이라 하나니라.

  중은 자신의 노력으로 수입되는 물질이라도 사사로이 쓰지 못하나니 중의 것은 다 삼보(三寶)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으면서 중의 명목으로 시주물을 얻어 쓰는 것은 사기쳐 재물을 모으는 것이니라.

  중노릇을 잘못하면 국가·속가·불가에 죄인을 면치 못하나니라.

  자성이 더럽혀지기 전인 어렸을 때에 출가하여 평생을 걸림없이 중노릇을 잘하여 마치는 이는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 복이니라.

  요사이는 시주의 밥만 허비하는 중이 많기 때문에 진실하게 공부하는 중의 생활을 보증해 주는 신도가 없게 되었으나, 도를 위하여 하는 노력은 곧 도가 되나니, 도를 위하여는 지악(至惡)의 경지에서도 용기있게 노력하여 정진해야 하나니라.

  사상적 방향은 정진에서만 확정을 하게 되고, 사상적 방향을 정하게 되어야 인생의 바른 길을 걷게 되고, 인생의 바른 길을 걷게 되어야 인생의 영원겁(永遠劫)에 장래를 보증할 수 있나니라.

  세속의 일은 잠시라도 쉼이 있지만, 중은 정진하는 일을 꿈에라도 방심할 수 없나니, 털끝만한 틈이 벌어져도 온갖 마장(魔障)이 다 생기나니라.

  백천만인을 죽인 살인자라도 허심탄회하게 부처님께 귀의하여 정진하는 중만 되면 백천 만인의 원결을 푸는 동시에 백천 만겁에 지은 죄업이 몽땅 소멸되나니라.

  중생이 보고 듣고 일하는 것이 모두 허무하게 되는 것은 망아(妄我)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중생은 시공간(時空間)에 의하여서만 생존하는 것으로 집착된 까닭에, 시공의 제재하(制裁下)에 육도윤회를 면치 못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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