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법(참선법)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바른 길을 가르쳐 주나니라.

  수도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생생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든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선방만이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지만, 선방에 상주하는 것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에 간단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선은 절대로 혼자 하지 못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지식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마디 얻어듣기란 천만 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마디를 옳게 알아듣는다면 참선할 것도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된 사람으로 불조의 혜명(慧命)을 상속받은 분이니라.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 보내 버리고 하여, 신행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果報)를 얻나니라.

  선지식을 믿는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나니라.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신심(信心)·분심(憤心)·의심(疑心) 이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動)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에는 다시 인간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길이 멸한 곳[心行處滅]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20세에서 30세까지가 가장 적당한 나이니라.

  참선법은 평범한 언구나 공부가 아니요, 상대(相對)가 끊어진 참구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에서 얻은 한 낱 이것만 같지 못하니라.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으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라,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의 장애가 제일 힘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해야 하느니라.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삼대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도사(道師)·도반(道伴)이니라.

  도를 지키는 사람은 도절(道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의 절도를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나니라.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모두 끌어안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 강한 것이니라.

  참선을 하여 인생문제만 해결되면 다생억겁에 지은 갖은 악과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사생 육도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도를 닦는 중에는 사람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 지나니라.

  참선법은 옛부터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수없는 도인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천칠백여개가 있는데, 내가 처음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란 화두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의심이 두 개로 갈라지므로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무엇인고?」이렇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백지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예전에는 선지식의 일언지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리는[頓忘生死] 이도 있고, 늦어야 3일, 7일에 견성(見性)한 이도 많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도 박약하지만 참선을 부업으로 해 가기 때문에 20년, 30년 동안 공부한 사람이 불법의 대의(大義)를 모르는 이가 거의 전부니라.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주지 못하나니라.

  참선을 하려면 먼저 육국(六國)의 전란(戰亂)을 평정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육국 : 眼 耳 鼻 舌 身 意의 여섯 감관기관

  가장 자유롭고 제일 간편한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염라국 사자(使者)의 눈도 피할 수 있나니라.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짐이 곧 우주의 건립과 파괴요, 인생의 생사니라.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르쳤다 함은 물질 이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니라.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꿈속에서도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을 삼을 것이니라.

  꿈도 없고 생시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어디에 두는 지 알아야 하느니라.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

  꿈과 생시가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해 나갈 수 있어야 하나니라.

  산 몸이 불에 탈 때에도 정상적 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헤아려서 미치지 못한다면 사선(死線)을 넘을 때 자기 앞 길이 막막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하나니라.

  공부인이 공부를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공부 아니하기가 하기보다 더욱 어려우니라.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나니라.

  참선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濕氣)를 녹이는 용광로니라.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극독심(極惡極毒心)이 아니면 8만 4천 번뇌마(煩惱魔)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

  사형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餘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공부하는 데는 망상보다도 수마(睡魔)가 두려운 것이니, 수마를 먼저 조복(調伏) 시켜야 하나니라.

  사람 몸을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니 사람 몸을 가졌을 이 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

  사람 몸 한 번 놓치게 되면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공부에 득력(得力)을 못하였을 때 눈빛이 안광낙지 하게 되면 업(業)만 남아 짐승도 미남, 미녀로 보여서 그 뱃속에 들기 쉬우니라.
※안광낙지(眼光落地) : 죽을 때를 말함.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변소에 앉아 있는 동안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일념에 든다면 견성(見性)할 수 있나니라.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 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나니라.

  밤자리에 누울 때 하루 동안의 공부를 점검하여 망상과 졸음으로 정진시간보다 많이 하였거든 다시 큰 용기를 내어 정진하되, 매일매일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공부하다가 졸리거나 망상이 나거든 생사대사(生死大事)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다시 살펴본다면 정신이 저절로 새로워질 것이니라.

  사선(死線)을 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私心)의 여유가 있다면 참선하는 기억조차 사라져 없어지느니라.

  생사 윤회의 생활을 면하려고 출가한 중이니 만큼 참선법을 여의고 하는 일은 모두가 생사법(生死法)을 익히는 것이니라.

  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구하는 마음으로 참선한다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라.

  설사 도인이 온갖 신통변화를 부리고, 죽을 때에도 불가사의한 이적(異蹟)을 보일지라도 이는 상법(相法)이니, 이런 상법이란 하나도 가히 취할 바는 아니니라.

  믿음은 부처를 찾아 오르는 발판이기 때문에 몰아적(沒我的) 믿음의 발판을 딛고 부처를 넘어 각자의 자기 정체(正體)를 찾아야 하나니라.

  선을 닦는 사람은 선학자(禪學者)의 행위를 엄숙히 가져서, 입을 열지 않고서라도 남을 가르치게 되어야 하나니라.

  공부의 과정에는 지무생사·계무생사·체무생사·용무생사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사무애하게 되는 대자유인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없는 경지를 체달하는 것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없는 경지를 내마음대로 쓰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에 걸림이 없는 것
    사무애(事無碍) : 사물에 걸림이 없는 것


  공부할 때에 짐짓 알려는 생각을 말고, 정진력만 얻으면 공부는 저절로 성취되나니라.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진을 게을리 하다가는 불법인연 마저 떨어지기 쉬우니라.

  물체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한 모양도 없는 자리에서 일체 행동으로 능히 현실화 할 수 있나니라.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이라, 어디서 무슨 일이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의 사람이 되나니라.

  정신이라는 전당(全當) 안에는 생사와 선악이라는 두 배우가 돌아가면서 삼라만상이란 배경 앞에서 희비극을 무한한 형태로 연출하고 있나니라.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도인은 도인이라는 대명사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하여, 도인이라는 우상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야 육도(六道)를 자기 마음대로 다니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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