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황통판(黃通判)에게 드리는 글


  별지(別紙)의 실천담(實踐談)을 받아보니 진실로 진리에 뜻을 둔 사람이지, 부질없이 얘기 밑천이나 삼는 들뜬 근기나 그저 말만 숭상하는 천박한 학자가 아니십니다. 더구나 하나의 큰 인연은 사람마다의 근본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훤칠하게 융통하여 뭇 현상을 포괄하고 멸하지도 나지도 않으면서, 고금에 뻗쳐 항상 일을 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 없는 망상과 습기에 가리워 억지로 알음알이를 짓기 때문에 오롯이 벗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총명하신 공께서는 지금 이미 마음을 쉬고 힘을 다해 참구하여, 모든 허망한 인연을 떠나 여여한 성품을 아셨으며, ‘모든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보려 하십니다. 만약 확연하게 한결같이 오래도록 공부를 하시면 결정코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마치 저 부처님이 “모든 모습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한 말씀대로 모든 모습의 당체는 끝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기의 마음으로서 ‘모습 아님’이 됩니다.

  즉 여여 하게 왔다가 여여 하게 가면서 둘도 없고 다름도 없습니다. 온 전체가 그대로 참이라 본래 청정한 묘명진심에 계합하나 다만 자기의 본래면목일 뿐입니다. 굳이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을 버리고 ‘모습 아님’을 위하여 밖에서 이러 저리 찾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 맑고 고요하여 사물과 내가 한결같고 여여하며 경계와 마음은 애초에 두 종류가 없습니다.

  요컨대 마음이 그윽하고 경계가 고요해야 그런 뒤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깨달아 들어가고 나서는 깨달음도 깨달음이 아니며 들어감도 들어감이 아니어서, 마치 통 밑이 빠지듯 단박에 꿰뚫어야 비로소 남이 없고 함이 없으며 몹시 한가로워 현묘한 도의 바른 당체에 계합하게 됩니다.

  지금 하시는, 마음을 쉬고 사려를 맑히는 공부는 도에 들어가는 문호의 첩경입니다. 다만 이 마음만 갖춘다면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옛분이 말하기를, “선정(禪定)에 편안히 쉬지 않는다면 여기에 이르러 온통 아득하리라”하였습니다. 이를 꿰뚫어 철두철미한 곳에 도달하면 현묘랄 것도 없어서, 불조라고 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향상의 대기대용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행리처라도 다시 있음[有]을 알아야 비로소 됩니다.

  이 일은 말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운문(雲門)스님은 “가령 말속에 있다면 일대장교가 어찌 말 없음이겠으며, 어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도리를 빌리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사가 오셔서 오직 ‘직지인심 불립문자 어구’만을 논했던 것은 알음알이를 잊고 참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겠습니다. 맑고 면밀하게 해서 한 생각도 나지 않게 되면 지난날의 지해, 책략, 기틀, 경계로 헤아린 도리를 벗어버리고 마음을 잊고 곧장 증득하게 됩니다. 그런 뒤에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서 이 정인(正印)으로 일체의 모든 모습에 도장을 찍으면 다른 모습이 아니어서, 척척 들어맞아 모두가 진정 명묘한 큰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깨달은 뒤에 다시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불조가 보여주신 정인정과(正因正果)를 의지하여, 세간에 잡되게 물들어 도를 해치는 모든 좋지 못한 업을 싹 물리치고 안온한 경지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삼십년을 이것만을 생각하여 이 마음을 고목처럼 담박하게 하면 이 몸 그대로 견고한 법신을 성취합니다. 인과를 무시하여 그저 텅 빈 공(空)이라거나 걸림 없다는 견해를 지을까 정말 걱정입니다. 이는 독 있는 가시이니, 부디 참구하여 깊은 깨침 도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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