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묘각대사(妙覺大師)에게 드리는 글


  도를 배우려면 우선 스승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정수리에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만났다면 그에 의지해서 생사를 해결해야 합니다. 반드시 용맹하게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망정을 잊은채 참구해야 합니다. 깨달아 들어감을 바탕으로 하여 본래부터 홀로 벗어나 걸림 없는 본분사를 밝혀내야만 합니다. 매일 덜어내고 나날이 덜어내어 의심 없고 지극히 참되고 완전히 쉬어버린 곳을 밟게 되면 이른바 안목을 갖춘 참학자입니다.

  승부가 있고 형식을 간직하면 비록 이왕에 뛰어넘어 수승하다 하더라도 있음[有]도 모르고 마음을 두지 않으며 도를 배우지 않고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리하여 이 종문에 있어서는 아직 깊이 들어간 게 못됩니다. 이는 오히려 도중에 있는 것이니 역시 가련하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출가하여 세속을 떠난 자는 요컨대 성인의 도를 널리 펴고 모든 사람을 제도하되 사람을 제도했다느니 도를 얻었다느니 하는 자취가 없어야 비로소 향상인 의 행리처에 초연히 나아갔다 하겠습니다. 향상인이 제 스스로 불법을 알고 묘과(妙果)를 증득하여 불조를 초월했다고 말하겠습니까. 분명히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것은 대개가 털끝만큼이라도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알음알이로 깨달아 들어감을 찾는 때문인데, 그러나 마침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치연하게 견해의 가시를 내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덕은 “저 체득한 사람은 무심을 지킬 뿐이다”라고 하였으며, 왕노사[王老師: 南泉]는 다만 바보처럼 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가 매양 이렇게 법문[垂示]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였습니까. “3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다[有]는 걸 모르는데 고양이와 흰 암소가 도리어 있음[有]을 안다”고 설사 완전히 고양이와 흰 암소가 된다하더라도 그 속에 눌러앉아선 안됩니다. 요컨대 이처럼 한다 하여도 저쪽에서 탁 손을 탁 놓아야 할 것입니다.

  협산(夾山)스님은 “그대가 푸른 연못을 거울처럼 맑게 한다 하더라도 끝내 밝은 달이 내려오게 하기는 어려우리라”했습니다. 다달아 사무치지 못한다면 이는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로서 돌장승의 머리를 방망이로 치는 격입니다. 진지하게 참다운 일을 논하여 구경처를 보아야만 합니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러나 요컨대 땀 냄새 밴 장삼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거기에 머물러 막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땀 냄새나는 장삼을 벗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번뇌를 벗어나 해탈을 얻은 무위무사의 큰 도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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