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달선인(達禪人)에게 주는 글


  큰 도의 당체는 혼돈(混沌)이 아직 나뉘기 이전이나 아득하고 황홀한 자리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고의로 깊숙하게 은폐하여 사람들이 알아차리거나 헤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한 밝음은 밝음이 아니며 지극한 오묘는 오묘가 아니니, 만약 숙세의 근기가 완전히 익어서 고요하면 들자마자 들어 보이고 단박에 귀결점을 안다.

  그리하여 다시는 밖으로 치달려 찾지 않고 바로 자신의 발밑에서 백 가지를 맞추고 천 가지를 알아차려 완전한 당체를 그대로 이룬다. 나아가 경계에 부딪히고 외연을 만나더라도 모조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무쳐 눌러 앉고 꽉 쥐고 주인이 되어, 끝내 다른 사람의 혀끝에서 나온 주장이나 고금의 가르침, 기연, 경계의 공안을 가지고 철칙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부터 작가 선지식은 오직 이것을 들고서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아차려 걸머지도록 하였을 뿐이다. 어찌 다시 단계나 지위 점차 등을 세운 적이 있겠는가.

  이런 경우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요즈음 형제들이 전적으로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요는 힘을 덜지 못했다는 것이다. 큰 근본, 큰 그릇, 큰 기틀, 큰 작용을 갖추어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쳐서 골수에 사무쳐 통렬하게 깨달아 지녀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한 번 빗나가기만 하면 그대로 알음알이의 길인 언전의식(言詮意識)의 6근, 6진으로 들어간다. 그 때문에 저 방편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의심 품는 것을 면치 못한다. 그리하여 5년 10년씩 해온 둔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끝내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한다.

  평소에 매양 형제들에게 권하노니, 모름지기 맹렬하게 분심을 내서 이제껏 배워 안 것과 얻고 잃음의 틀을 버려라. 흡사 만길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듯 목숨을 놓아버려 그로부터 숨결 하나 없이 아주 죽은 사람처럼 되면 밥숟갈 드는 사이에 다시 깨어나면, 그대를 속이려 해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다하고 나서 실제의 경지에 당도하여 밟으면 허공처럼 넓고 태양처럼 밝아서 다시는 조작이 필요치 않다. 일체가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하루 종일 모든 성인들과 함께하면서 모두가 수승하고 기특하여 씻은 듯이 벗어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다리 가는 대로 가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왜 듣지도 못하였느냐. 옛날 큰 스님이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도는 깨달음을 말미암고 법은 보고 들음을 떠났다”고 했던 것을 만약 정확하게 깨닫는다면 다시 무슨 부처님의 말할 줄 모를까 근심하랴. 부디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견해를 일으키지 말고 놓아버려 가슴 속을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엿보기를 오래하면 반드시 믿고 들어가는 곳이 있으리라.

  만일 한가로움만을 지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면, 요컨대 노주(露柱)와 등롱(燈籠)에게 참문하라. 부처의 종성(種性)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죽은 물 속에 처박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결코 그대를 속이지 못하리라.

  보리는 언설을 떠나 있으며 원래부터 체득한 사람이 없다. 마혜수라(摩醯首羅)의 진정한 안목을 갖춘 영리한 납자는 듣자마자 바로 들어 보이고 바로 꿰뚫어 살펴서 한량을 지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떨어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혹 언어적인 주장을 허용하면서 “언설을 떠남이 진실한 언설이며, 얻음이 없는 사람이 실제로 증득한 사람이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런 이는 그 자리에서 빗나가 언어문자에 속박되고 전도되어 끝내 위로부터의 일을 밝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종문에선 그윽히 계합하고 가만히 부촉함을 힘쓰나 이미 모든 부처님의 후예가 되었으니, 모름지기 가풍을 계승하고 정인(正印)의 심오한 방편을 완전히 제창함을 밝히고 생사번뇌의 못된 집착과 속박을 벗어야만 한다. 그래서 영가스님은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끝이며 금강의 불꽃이로다”하였다. 어찌 그 사이에 머뭇거림을 용납하겠는가.

  생사가 큰일이라고는 하나 진실로 투철히 벗어버리면 크다고 할 것도 없다. 무엇 때문일까.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알고 실제로 깨달아 여여(如如)하게 요동하지 않으며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안팎에서 핵심을 살펴 툭 트여 명백하고 처음과 끝이 모두 평등하여 애초에 얻고 잃음이 없다. 그리하여 항상 이 큰 광명을 잡고 두루두루 비추는데, 마치 해와 달이 높이 떠서가듯, 사자왕이 자유롭게 유희하듯 한다. 백천 겁을 줄여 일념을 만들기도 하고 일념을 늘려서 백천 겁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기도 하고 대천세계를 시방 밖으로 던지기도 하니, 모두가 일상적인 내 마음의 부분일 따름이다. 그런데 무슨 깨끗함과 더러움, 가는 것과 오는 것 따위에 장애되며, 생사득실에 얽매이랴. 고덕은 말하기를, “태어남은 마치 웃도리를 입는 것과 같고 죽음은 다시 바지를 벗어버리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는데, 그가 생사를 큰 변고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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