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유선인(有禪人)에게 주는 글


  “지극한 도는 어려움 없으니 그저 이것저것 가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한 이 말은 진실하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가림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마음이 생기고 나면 나와 남, 사랑과 증오, 좋고 싫음, 취하고 버림이 쑥쑥 일어나서 저 지극한 도로 나아가기란 요원하지 않겠느냐.

  지극한 도의 요점은 마음을 쉬는 데 있을 뿐이니 마음을 쉬고 나면 모든 인연이 쉬어버린다. 허공같이 툭 트여 조금도 의탁함이 없는 이것이 진실한 해탈인데 어찌 어려움이 있으랴. 그러므로 이근종지(利根種智)를 갖춘 옛분들은 잠깐 건드려주기만 해도 떨치고 일어나서 바로 떠나 통쾌하게 스스로 짊어지고 결코 그것과 관계하지 않았다.

  대매(大梅)스님의 ‘즉불즉심(卽佛卽心)’과 용아(龍雅)스님의 ‘동구의 물이 역류한다’와 조과(鳥?)스님이 실오라기를 입으로 불었던 것과 구지(俱脂)스님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웠던 경우는 모두 근원을 곧바로 깨달아 결코 기댐이 없었다. 지견의 장애를 훌쩍 벗어나 깨끗하니 더럽느니 하는 상대적인 견해에 걸리지 않고 위없는 진실한 종지를 초월 증오하여, 함이 없고 조작이 없는 경계를 밟았던 것이다.

  요즈음 도를 배우는 이가 이미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면 마땅히 힘써 옛사람과 짝이 되어 마음 깨칠 것을 기약해야만 한다. 참된 경지를 밟게 되면 하는 것마다 모두 근본자리로 돌아가 모든 성인도 그를 가두지 못하며, 알음알이가 다 없어지고 잘잘못을 모두 벗어난다. 바로 이것이 하고자 함도 없고 의지함도 없는 진정 자유자재한 도인이다. 여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다시 어려움과 쉬움을 논하랴. 결국 어려움 없고 쉬움 없는 그것 역시 있을 수 없다.

  납승이 말구절 속에서 몸을 벗어나는 까닭은 아마도 향상의 방편을 갖추어 말 없는 속에서 말을 드러내고, 몸 없는 가운데서 몸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말길이 끊기고 마음 갈 곳이 끊어져 무심하고 넓게 텅 비지만, 잠깐이라도 기연 있기만 하면 천지를 덮는다.

  이를 두고 이른바 면면밀밀하여 간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한 경지에서 이와 같다. 이 때문에 모든 하늘이 꽃을 바치려 해도 길이 없고 마군 외도가 가만히 엿보려 해도 볼 수가 없으니 이처럼 실천해야 자연히 모든 삼매를 초월한다고 할 만하다.

  옛사람이 무위무사로 극치를 삼은 것은 아마도 그 마음 근원이 맑고 텅 비어 융통하고 실제로 이 경계를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여기에 머물지도 않았으니 소반이 주옥을 굴리듯 주옥이 소반에서 구르듯 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어찌 급하게 단박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래서 죽은 뱀이라 할지라도 희롱할 줄 알면 살려놓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장경(長慶)스님은 말하기를“도반과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는 순간 일생의 참구하는 일을 마친다”고 하였다. 분명코, 홀로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일이 있는 줄을 알 수 있으랴. 진실로 알아야 할 것은 모름지기 이러한 사람만이 이러한 일이 있는 줄을 안다는 점이다. 어떤 스님이 조산(曹山)스님에게 물었다.

  “땅에서 자빠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난다 하는데 어떤 것이 자빠지는 것인지요?”
  “하려고 하면 자빠지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일어나는 것인지요?”
  “일어나는구나.”

  눈 밝은 사람은 꿰뚫어 보고 다시는 따로 구하지 않는다. 이 한 뙈기 터는 험한 곳은 험하고 평탄한 곳은 평탄하여, 선 자리에서도 밝히지 못하면 앉은 자리에서도 밝히지 못한다고 해야 무방하리라.

  옛사람은 뜻을 얻은 다음에 깊은 바위, 궁벽한 골짜기, 띠풀집이나 돌집에서 완전히 쉬어 마음에 간직했던 것을 놓아버리고 살아 나갔다. 명리를 버리고 세속에 관계하지 않으면서 자기 일을 마친 뒤에 인연을 따랐다.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한 번 나왔다 하면 반드시 무리를 놀라게 하고 대중을 조복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근원이 깊어 물줄기가 길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미 심산궁곡에 들어가진 못한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단지 본분에 의지하여 맑고 고요함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가는 곳마다 현재 그대로를 지켜 편안함을 얻을 것이니, 이것도 역시 심기(心機)를 쉬는 근본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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