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제상인(諸上人)에게 주는 글


  도는 본래 말이 없으며 법은 본래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말없는 말로써 생겨남이 없는 법을 드러내면 결코 제2의 것(第二頭)이란 없다. 잠깐이라도 쫓아가서 붙들려고 하면 벌써 빗나간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단지 이 일만을 창도하시면서 말 밖에서 체득하고 일 밖에서 알아차리는 것만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니 스스로 상상의 근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대뜸 알아차릴 수 있으랴. 그러나 여기에 목적이 있는 자라면 어찌 정도와 한량을 헤아리랴.

  요컨대 처한 위치가 준엄하여 단칼에 두 동강 내는 아주 영리한 몸과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짐 보따리를 내려놓고서는 악착같이 물어뜯는 악독한 솜씨를 가진 사람에 의지하여, 망정을 싹 쓸어버리고 이제껏 배워서 이해한 주장이나 살 속에 착 달라붙은 지견을 한꺼번에 엎어버려 대뜸 가슴이 텅 비게 해야 한다. 자기의 사사로움을 노출하지 않고 한 물건도 위하지 말고 그대로 철저하게 깨달아, 옛사람들과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다 해도 향상의 일이 있음을 알아서, 스승을 넘어설 지략이 있어야만 하리라. 그 때문에 옛날에 부처님의 향상 경계를 묻자 “부처가 아니다”라고 대답했고, 다시 “방편으로 부처라고 부른다”라고 답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견성성불도 방편일 뿐이니, 이 가운데서 어떻게 동쪽 서쪽을 가리키겠는가.

  모름지기 가만히 계합하여 스스로 잘 간직해서 마침내 쇄쇄낙락할 수 있으면 다시 무슨 열반을 증득한다느니 생사를 깨친다느니 하는 말이 있을 수 있으랴. 다 군더더기다. 그렇긴 하나 나의 말도 지극한 도리로 삼지 말아야 부처의 병통과 조사의 병통을 비로소 면하리라.

  대장부가 마음의 요처를 참구하려 한다면 어찌 일정한 한계를 세우랴. 다만 깊은 신심을 갖추고 한결같이 앞을 향한다면 실제의 경지를 밟지 않을 자는 결코 없으리라. 매일 새롭고 나날이 참신하며 매일 덜어내고 나날이 덜어내어 한 걸음 물러나 밑바닥까지 이르면 될 뿐이다. 그리하여 끝까지 이르러서는 그것마저도 세우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공부한 곳이다.
,
comments powered by Disq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