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조선인(祖禪人)에게 주는 글


  세존이 꽃을 들자 가섭이 미소하고, 이조스님이 절을 하자 달마스님이 마음을 전했던 것이 어찌 다른 것이겠는가. 화살과 칼끝이 서로 마주친 격이다. 신령스럽게 계합하고 이치가 맞는 상황은 언어와 사고로 헤아릴 바가 아니며 오직 향상의 종풍이 있음을 아는 자만이 깨칠 수 있다. 이는 천억 만년이라 해도 마치 하루와도 같다.

  그러므로 옛 불조께서는 이를 구할 적에 처음부터 경솔하게 하지 않고, 날카로운 지혜를 가진 상근기를 두드려 만든 뒤에 요점을 드러내 보이고 마리를 쳐서 가다듬기를 마치 아교풀을 옻칠에 잘 섞듯 하였다. 한 모서리를 들어 주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알아 정해진 형식 없이 자유자재로이 번뇌를 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수긍할 수 있다. 그런 뒤에 다시 걸러내고 연마하여 사람들이 끝까지 따지고 분별하지 못할 얽히고설킨 곳에 이르러서도 여유작작하다.

  수용할 때를 당해서는 차츰차츰 솜씨를 드러내 종지와 격식을 넘어서고, 스승의 뜻을 따르지 않고 흉금을 호젓이 드러내니 천길 절벽에 서 있는 듯하다.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적수를 능가하여 바야흐로 법의 부촉을 감당할 수 있다. 법이 가볍지 않아서 도 또한 존엄하니 이른바 근원이 깊으면 물줄기도 길다는 것이다.

  옛부터 고덕들은 한번 했다 하면 평생을 쏟았으니 혹은 20년이고 30년이고 깨달아 들어간 곳에 의지하여 철두철미하기를 기약하였다. 이미 뜻이 세워지고 나면 마음씀씀이도 견고 확실하게 되어, 이로써 성취하고 나서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을 땅에 올렸다. 대장부라면 높은 경지를 우러러 바라보는 것도 어쩌지 못해 그리 하는 것이다. 그들도 해냈는데 나라고 어찌 못하랴. 더구나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 미래가 다하도록 한 번 얻기만 하면 영원히 얻는 경우이겠느냐.

  반드시 근본을 깊고, 단단하게 해서 그것이 견고하면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언제나 있어서 달아나지 않게 하여 맑고 맑아 뭇 물상을 머금고 비추게 해야 한다. 그러면 4대6근이 모두 한갓 살림살이일 뿐이니, 하물며 그 밖의 알음알이와 언어문자로 아는 경우이겠느냐. 당장에 밑바닥까지 몽땅 놓아 버려서 지극히 참답고 일상적인, 완전히 평온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절대로 티끌만한 것도 얻을 것이 없다. 그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한 참된 무심도인이 되리라. 이 무심을 보임(保任)하면 끝내는 부처도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중생이라고 하겠으며, 보리도 없는데 무엇을 번뇌라 부르겠느냐. 홀연히 영원히 벗어나 시절을 따라 복을 받아들여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신다. 비록 시끄러운 세속의 거리에 있더라도 깊은 산 속처럼 고요하여 애초부터 두 종류라는 견해가 없다.

  가령 그를 극락의 연화좌에 데려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지하의 황천(黃泉)에 집어넣어도 싫어하지 않는다. 상황 따라 건립함도 나머지 여분의 일이거늘, 나에게 무엇이 있겠느냐. 대가섭은 이렇게 말했다.

법, 법하는 본래의 법은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나니
어찌 한 법 가운데
법과 법 아닌 것이 있으랴.

法法本來法 無法無非法
何於一法中 有法有不法

  옛사람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는 깊숙이 감추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으니, 일 생기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득이하여 사람들에게 붙들려 나오게 되어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무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비를 내려 방편을 베풀게 되더라도 그저 다만 풍성하면 풍성한 대로 검소하면 검소한 대로 가풍을 따랐을 뿐이다.

  구지(俱脂)스님은 한 손가락을 세웠을 뿐이며, 타지(打地)스님은 땅을 쳤을 뿐이고, 비마(秘魔)스님은 나무집게를 들었으며, 무업(無業)스님은 ‘망상 피우지 말라’고 하였고, 항마(降魔)스님은 홀(笏)을 들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격식과 승부라는 견해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쉼으로 돌아갈 것을 알아서 견해의 가시를 일으키지 않도록 힘썼던 것이다. 귀신의 소굴에서 정혼(精魂)을 놀리지 말고 우뚝하고 정성스러이 몹시 안온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오묘한 종지인 것이다.

  영리한 자라면 그 자리에서 모름지기 분명한 경지를 알아 등뼈가 무쇠처럼 단단해야 한다. 인간 세상에 노닐더라도 모든 인연을 허깨비로 보아서 잡는 것마다 주인이 되라. 인정을 따르지 말며 나다 남이다 하는 생각을 끊고 알음알이를 벗어 대뜸 견성 성불하여 묘한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는 것으로 계단을 삼아야 한다. 작용하며 인연에 응하게 되어서는 형식에 떨어지지 말고 ‘한 덩어리’를 오래도록 가져서 고요하고 담박한 몸과 마음을 영원토록 지키면서 티끌번뇌에서 투철히 벗어나야만 훌륭하고도 훌륭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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