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감상인(鑑上人)에게 주는 글


  조사 문하에서는 본분강령만 제창하니 한 마디에 뭇 흐름을 끊어 모든 경계를 다 없앤다 해도 벌써 잡다함에 빠진 것이다. 그러니 더구나 말 위에서 말을 내고 경계 위에서 경계를 내는 경우이겠느냐. 한 무더기 많은 언어문자를 자세하게 따져서 심전(心田)을 더럽히면 언제 끝날 기약이 있겠는가. ‘이 일’이 말이나 경계에 있다면 총명함으로 알아차리고 들뜬 근기로 부질없이 식별하는 자들이 세간 사업을 배우듯 하여 아득히 동떨어지리니, 어찌 여기에 깨달음을 틔우느니 성품을 보느니를 논하랴.

  석가 부처님이 한 번 나오셔서 기특하고도 승묘한 일을 무궁히 나투신 것도 오히려 시절 인연을 위해 빙 둘러 하신 말씀일 뿐이며, 최후에 가서야 비로소 이 도장을 가만히 부촉하셨다. 달마스님이 9년을 소림에서 차갑게 앉아 있었는데, 유독 혜가조사만이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이를 “교 밖에서 따로 행하며 외길로 심인(心印)만을 전수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 마음 도장을 어떻게 전수하겠는가?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짝이는 것으로인가? 아니면 불자를 들고 선상을 치는 것으로인가? 아니면 아무 말 없이 그저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으로인가? 이와 같은 것도 모두 아니고 단박에 알아차리게 하는 것으로인가? 아니면 향상 향하와 면전 배후에 따로 특별한 일을 둠으로서 인가? 아니면 성품과 이치를 논하여 연원에 깊숙이 들어감으로서 인가? 위와 같이 한다면 흡사 방망이를 휘둘러 달을 때리는 것과도 같아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세간의 거치고 들뜬 얄팍한 식견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요컨대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듯 대뜸 뛰어넘어 완전히 사무치고 완벽하게 증득해야만 하리라. 한결같이 참구하고 법문을 청하여 꼭 꿰뚫어야지 형식적인 소굴에 안주해서는 안되니, 그것은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허물을 끼친다.

  그 때문에 옛부터 작가종사는 이 하나를 우러러 소중히 여겨 경솔하게 맡기지 않았고, 경솔하게 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듣지도 못했느냐. “분골쇄신한다 해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나니, 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하신 영가(永嘉)스님의 말씀을.

  비마(秘魔)스님은 평소에 그저 나무집게 한 개를 가지고 있다가 사람만 보면 “어떤 마군 도깨비가 그대를 출가하게 하였느냐? 어떤 마군 도깨비가 그대에게 행각하라 하였느냐? 말을 해도 나무집게에 찝혀 죽을 것이며, 말을 못해도 나무집게에 찝혀 죽으리라”하였다. 그 한 마당을 따져보면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했으랴. 아마도 풀구덩이 속에 들어가 사람을 구제함일 것이리라. 만약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많은 갈래가 있겠는가. 요란스러이 어지러움에 잠깐이라도 빠지기만 하면 천 리 만 리 나 멀어진다. 금강권(金剛圈)을 뛰쳐나 밤송이를 삼켜야만, 자연히 귀결점을 알리라.

  이 종지를 알아차리는 요점은 의식과 마음을 쉬어서 마치 마른 나무 썩은 기둥처럼 차갑고 쓸쓸한 경지에서, 6근, 6진이 짝하지 않고 동과 정이 상대가 끊겨서 서 있는 자리가 텅 비어 안배하여 들어앉을 곳이 없이 벗은 듯 텅 비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이른바 ‘사람은 무심하게 도에 합치하고 도는 무심하게 사람에게 합치한다’는 것이다.

  중생들을 만나 인연을 따르는 데 있어서도 다른 견해를 내지 않고 다만 지금 그대로의 한 기틀, 한 경계에 의거하여 모두 그대로 눌러 앉아버리니, 다시 무슨 방, 할, 조(照), 용(用), 권, 실을 말하겠는가. 한 번 했다하면 그대로 꿰뚫어, 오직 나만 알 뿐 다시는 다른 일이 없다. 오래도록 이처럼 해나간다면 본분사를 끝내지 못할까 어찌 근심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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