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조선인(照禪人)에게 주는 글


  석공(石鞏)스님은 30년을 한 활과 두 개의 화살로 반 사람을 쏠 수 있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였을까. 아마도 이 가운데서는 이러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그런가? 듣지도 못하였느냐. 향상의 한 길은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고 했던 말을. 만약 전하지 못하는 뜻을 체득한다면 바닥까지 다한 것이다. 이 일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대가 마음 기틀을 쓸 곳이 없으며, 그대가 몸을 들이대고 앉을 처소도 없다.

  그러므로 옛부터 ‘곧바로 가리킴’만을 제창하여, 사람들에게 격식 밖에서 현묘하게 깨달아 흙탕 속으로 이끌지 않고 티끌 인연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저 상근기 무리들은 듣자마자 들어 보이고 뽑아들자마자 바로 행한다. 갖가지 방편을 모아서도 그를 붙잡을 수가 없으며 모든 성인이 그를 가두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이처럼 참구해서 깨달아 들어가야 하고, 이처럼 받아 지녀서 제창하고 거량해야만 하는데 어찌 어리석은 놈을 거론하랴.

  각자가 별똥 튀듯한 눈을 가져 살인을 하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상응할 수 있으니, 만약 주저주저했다가는 천만갈래로 빗나간다. 이 하나 지극한 보배의 경지가 있어야만 천차만별을 건립하게 된다. 만일 진실로 이러한 데 이르면 결코 괴상한 모습을 날조하거나 본[本]을 그려내지 않는다. 다만 무심을 지키는 것도 얻을 수 없는 일이니, 자기를 세워 투철히 벗어나고 중생의 결박을 풀어주는 데 이르러서도 모조리 땅에 웅크리고 앉은 시절일 뿐이다.

  임제스님은 말하기를 “산승의 견처는 요컨대, 여러분이 모두 단박에 보신, 화신불의 머리에 눌러 앉을 것을 알게 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이 법문에 의하면 이미 보신, 화신불을 눌러 앉았는데 향상일로에 다시 무엇이 있겠으며, 어찌 세간의 거친 망상으로 헤아릴 바이겠느냐.

  요컨대 반드시 종전의 망상과 계교, 집착, 망정의 티끌, 낫다 못하다는 견해를 물리쳐서 본성의 이치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끝내 본분이 아닌 것은 한 칼에 잘라야 곧바로 벗은 듯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털끝만큼이라도 시방세계 티끌을 포섭치 않음이 없어서 작용하는 모든 것이 불조이며, 모든 불조가 바로 작용이다. 한 번의 몽둥이질, 한 번의 ‘할’, 한 마디 말, 하나의 경계에 전혀 고정된 틀이 없다.

  일체를 실제 깨달음으로 도장치니 마치 영약을 만들 듯 무쇠를 두들겨 금덩어리가 되듯 모조리 나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다. 이미 오랫동안 참당하여 법을 묻는 사람도 지견과 알음알이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견문만을 더할 뿐 끝내 실제의 일은 아니다.

  모름지기 한 번 쉬어 일체를 쉬고 하나를 알아 모두를 알아서 이 본래면목을 보아 본지풍광을 통달해야만 한다. 그런 뒤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일체가 있는 그대로 완전하여 마음의 힘을 빌리지 않으니, 마치 바람이 부는 대로 풀이 쏠리듯 한다. 숲 속과 시장거리가 다르지 않으니, 이것을 ‘꽉 움켜쥐고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중생의 명맥(命脈)을 저울질함이 자기의 손아귀 속에 있고 마음대로 어떤 판단이든 한다. 바로 이것을 작용 없는 도라 부르니, 어찌 지극한 요체이며 지극히 안온한 큰 해탈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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