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장자고(張子固)에게 드리는 글


  큰 도는 일정한 방향이 없어 오직 이근종성(利根種性)이라야 한 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안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벗은 말쑥하고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 하여 애초에 얻고 잃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릇 중생과 부처가 나뉘기 전, 확 트여 밝고 오묘하며 전혀 기댐이 없이 우뚝 독존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생각이 반연을 좇아 이 진실한 바탕을 등져 마침내는 상응하지 않는 많은 업을 일으켜, 환히 밝은 가운데 표류하며 잠시도 쉴 틈이 없게 되었습니다. 경계에 깊숙이 빨려들어 마음의 근원이 혼탁해져 으레히 그런 줄 여기게 됩니다. 보고 듣는 것은 모두가 성색(聲色)을 벗어나질 못하는데, 미혹과 망상으로 스스로를 결박했기 때문입니다.

  큰 해탈을 참구하는데 이르러서는 아득하고 망망하여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식(識)의 물결은 도도하게 넘쳐흘러 잠시도 쉬지를 않으므로 깨달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옛날에 익힌 한 조각 선업이 있어 기쁘게 살피고 믿어 그것을 구하려 하니 매우 착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엎드리고 참당하여 묻는데 이르러선 다시 깜깜해집니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버리고 떠나 오랫동안 푹 익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알아차리려 한다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마음고동을 모두 물리치고 흙과 나무처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절이 도래하면 홀연히 스스로 통 밑이 빠지듯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지풍광에 계합하여, 맑고 변함없고 청정하고 함이 없고 오묘하고 밝은 이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꼭지가 견고하고 뿌리가 깊숙하여 금강처럼 견고한 진정한 자체에 도달하여 온 몸으로 짐을 걸머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야 천차만별이 다한 이치로 귀결하고 동과 정이 한결같고 마음과 경계가 맞아듭니다. 그러면 하나를 밝히면 일체를 밝히고 하나를 깨달으면 일체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수미산이다'를 들어 보이고, 어떤 때에는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말하는 일체의 기연과 경계가 어찌 다른 데로부터 발현하겠습니까. 나아가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할'을 하며, 나무집게를 들이대기도 하고 공을 굴리기도 한 일들이 모두가 하나의 도장으로 찍은 것입니다. 생사와 열반은 마치 어젯밤 꿈과 같아 자연히 편안하고 한가합니다. 푹 쉬어버릴[休歇] 곳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쓰고 싶으면 바로 쓰고 말하고 싶으면 바로 말하면서,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십니다. 평상심에 계합하여 부처라는 견해나 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도 일으키지 않는데, 더구나 업 짓는 마음을 일으키고 착하지 못한 생각을 내겠습니까. 결코 그런 태도를 지어서 인과(因果)를 무시하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이렇게 해서 설법좌를 얻어 법의를 걸치고 조복해서 이끌고 항복을 받아 무심과 상응해야만 구경의 귀착지인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더러운 옷을 벗을 뿐이다"하였고, 암두스님은 "무심함을 지킬 뿐이다"하였습니다. 운거(雲居)스님은 "천 만 사람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다"하였으며, 조산스님은 "독벌레가 있는 동네를 지나듯 물 한 방울도 그를 적시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성태(聖胎)를 기른다"하고 "더럽힐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이제껏 지어왔던,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상대적인 생각을 버려야만 합니다. 행주좌와 어느 때나 마음을 다해 참구해야만 스스로 힘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옛부터 내려오는 고덕들의 첩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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