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장국태(張國太)에게 드리는 글


  이 큰 인연은 옛 불조께서 독특하게 행하고 창도하여 최상승의 명민하고 날카로운 근기들을 제접한 것입니다. 요컨대, 망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나 마음 고동[機關]을 깨닫고 우뚝하고 생생하게 번뇌를 꿰뚫으려 한다면, 거량하지 않아도 먼저 알고 말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조짐이 있기만 하면 한 번에 싹뚝 끊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밝히지 못했다 해도 결코 의근(意根)으로 이리저리 사량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정신을 차려 분명하게 깨닫고 짐을 걸머져, 마치 하늘의 莫?모든 어둠을 밝히듯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옛부터 고덕들도 단독으로 제창한 곳에 이르러선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고, 두루두루 뽑아내버리고 나서 나아갑니다. 아무 것도 없이 깨끗이 하여 만법과 짝하지도 않고 모든 성인들과 거처를 함께 하지도 않으며 홀로 벗어나고 훌쩍 올라서서 자유자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은 ‘방’과 ‘할’을 휘두르면서,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며, 사로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여 일정한 틀에 갇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어방편의 작용에 있어서도 일시에 그대로 끊어버려, 성인범부의 길이 끊기고 잘잘못의 망정을 버려서 완전히 쉬어버린 자리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무엇을 생사라 부르겠습니까.

  가슴이 텅 비어 관조조차도 세우지 않되 만나는 인연마다 그대로 종지입니다. 꺼내들면 하늘을 덮고 땅을 덮으나 자비방편에 의지하여 수준을 낮추어 상대해 줍니다. 이는 바로 영리한 근기들에게 허망한 인연과 악각지견(惡覺知見)을 떨쳐버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공한 자리를 사무쳐서 그 공하다는 것마저도 간직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마치 허공이 삼라만상을 포함하여 관장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하여 물물마다 곳곳마다 큰 해탈을 얻어야만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향상의 행리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향상의 행리란 모든 성인이 가만히 전수한 곳이니, 어찌 만 길 절벽에 서 있다든가 천 리 만 리나 떨어진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온 누리를 가져온다 해도 한 티끌만큼도 가지지 않으니, 이를 “위대한 작용이 목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삼십년씩 오래도록 길러 푹 익어야만 깨달아집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함을 이미 확실히 밝혔다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함을 거듭 그 자리에서 점파해버려, 그 말에 매달리지 않고 그대로 뚫으면 옛 사람의 붉은 진심을 보겠지만, 만약 머뭇거렸다가는 그대로 빗나갑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하자, “그대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즉시 그대에게 말해주리라” 하였는데, 이는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요점을 살핀 것입니다. 왜 이처럼 단박 알아차리지 않습니까. 그저 그의 말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투철하게 벗어나질 못합니다. 학인들이 이처럼 헤아리고 말을 하면서 합치하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래서야 어찌 생사를 꿰뚫어버린 견해라 하겠습니까. 생사를 꿰뚫고 싶다면 마음바탕을 열어서 통해야 하는데, 이 공안은 마음바탕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밝혀서 요달하고자 한다면 말 밖에서 종지를 알아차려야 비로소 의심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옛날 수산주(修山住)는 지장(地藏)스님을 뵙고서, 수없이 산 넘고 물 건너 고생고생 해서 스님을 찾아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지장스님이 말하였습니다. “많은 산천이 그대를 싫어하진 않았겠지.” 여기서 수산주는 통밑이 빠진 듯하였습니다. 위와 같다면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길을 말하는 사이에도 반드시 보임(保任)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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