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가중현량(嘉仲賢良)에게 드리는 글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부처 그대로가 사람이어서 사람과 부처가 차이가 없어야 비로소 도라 했으니, 이는 진실한 말입니다. 마음만 진실하면 사람과 부처가 모두 진실합니다. 그러므로 조사께서는 오로지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견성성불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나 가진 이 마음은 오랜 세월 전부터 청정무구하고 애초부터 집착이 없으며 고요하되 비추면서 응연(凝然)하여, 마침내 주관과 객관이 없어 완전하고 원만합니다.

  그러나 다만 자성을 지키지 않고 한 생각을 허망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이윽고 가없는 지견을 일으켜 모든 존재[有]에 표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 있는 자리에 항상 이 본지풍광을 차고 있으면서 한번도 어두운 적이 없었으나 6근과 6진에 부질없이 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숙세의 근기를 바탕으로 모든 불조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신 경계를 만난다면, 그대로 뒤집어서 기름때 낀 누더기를 벗어버리고 적나라하게 되어 대뜸 깨치게 됩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며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확연하게 이 성품을 분명히 깨칠 뿐인데, 무슨 다시 사람이니 부처니 마음이니 하겠습니까. 마치 활활 타는 용광로 위에 한 점의 눈을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은데, 다시 무슨 허다한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종문[宗門]에서는 말이나 문자를 세우지 않고 최상승의 근기만을 인정할 뿐입니다.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고 전광석화처럼 단박에 깨쳐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명의 껍데기를 부숴버려 조금도 의혹이 없습니다. 그대로 단박에 밝혀서 하루 종일 모든 외연을 굴려서 위없는 오묘한 지혜를 이루니, 어느 겨를에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며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겠습니까.

  한 번 진실하면 일체가 진실하며, 하나를 알면 일체를 압니다. 마음의 근원에 만유를 총괄하고 세상 저 밖에서 방편의 기틀을 움켜쥐어서, 사물에 응하는 대로 형체를 나타내니, 나에게 법마다 원만하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선 자기의 귀결점을 정해야만 합니다. 서 있는 곳이 굳게 다져지면 자연히 바람 부는 대로 풀이 쏠리게 마련입니다.

  그 때문에 왕노사[王老師]는 열여덟 번 만에야 살 궁리할 줄을 알았으며, 향림(香林)스님은 40년만에야 ‘한 덩어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번뇌의 짝이 바로 여래 종자가 되는 일은 다만 당사자 스스로 바람을 잘 살펴 돛을 조절하는 데 있습니다.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지고 마음 마음이 머물지 않아 이 영원히 사는 길을 밟는다면 불조와 똑같은 덕, 같은 본체와 작용, 그리고 같은 깨달음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방 백리 되는 고을 다스리는 것쯤이야 손끝에나 있겠습니까. 백성을 편안히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면 저절로 편안해집니다.

  세상 모든 일이 이 한 기미에 동화되며 모든 차별이 이 하나의 관조에 일치됩니다. 티끌 같은 법계도 두루 통하는데 하물며 사람과 부처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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