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초연거사(超然居士)에게 드리는 글


  조산(曹山)스님이 오본(悟本洞山)스님을 하직하자 오본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려는가?”
  “변함이 없는 자리로 가렵니다.”

  그러자 다시 따져 물었습니다.
  “변함이 없는 자리인데 어찌 가는 것이 있느냐?”
  “가는 것도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직접 참된 자리를 밟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처럼 투철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말과 생각[機思]으로 헤아릴 바이겠습니까. 그러니 아마도 지극히 심오한 곳을 밟아 번뇌 없는 극치에 도달했기 때문이니, 그런 뒤에는 가두어둘 수 없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확실한 목적을 세워 몸뚱아리를 벗어나 생사를 하나로 보고 고금을 합치며 오고감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요컨대 뛰어난 무리들과 인연을 맺어 지극히 진실하고 깊숙한 경지에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결단내고 적나라한 데까지 뽑아 드러내 실낱만한 알음알이 때문에 티끌 인연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마음을 마른 나무나 썩은 기둥처럼 하여, 마치 완전히 죽어서 조금도 호흡이 없는 사람처럼 해야만 합니다.

  마음 마음에 알음알이가 없고 생각 생각마다 안주함이 없어, 천만의 성인이 나와도 흔들리지 않아야만 비로소 마른 나무에서 꽃을 피울 것입니다.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발휘하고 자비를 일으켜야만 공 없는 공이며 작위 없는 작위이니, 어찌 득실과 시비에 떨어지겠습니까. 한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속에 남겨둔 것이 있기만 하면 생사의 경계에 저촉되어 자기도 제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제도하겠습니까. 유마대사(維摩大士)는 금속여래(金粟如來)의 자리도 팽개치고 술집과 기생방에 들어가 큰 해탈의 불사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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