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흥조거사(興祖居士)에게 드리는 글


  허망한 속박을 벗고 생사의 소굴을 부수려면, 첫째 근기가 매서워 날카롭게 트여야 하며, 다음으로 영원토록 물러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역량을 크고 깊게 하여 마군이나 경계인연에 흔들리지 않고 불조의 큰 법으로 본심에 도장을 콱 찍어야 합니다. 이 마음은 진정명묘(眞淨明妙)하여 홀로 우뚝하게 존재합니다.

  허공세계는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이것은 애초부터 변하지 않습니다. 똑바로 한결같이 부여잡고 탐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물(物)과 아(我)가 하나가 되면 아래로 사무치고 위로 통합니다. 금강의 바른 몸은 분명하고도 분명하여서 털끝만큼도 샐 틈이 없이 영롱하여 광채가 사무치니, 만 년이 한 생각입니다. 처음엔 비록 완전하지 못하다 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뿌리치면 날이 갈수록 친근해집니다. 북실이 오고 가듯 끊기지 않게 길러 푹 익게 되면, 하루종일 모든 경계 속에서 착착 육진을 벗어날 의식과 몸이 빠져나올 길이 있습니다.

  청정한 계행을 지니되, 계행에 집착하는 생각이 없으며, 호호탕탕히 수행을 해도 공부한다는 생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저 한결같이 자취를 남기지 않으면 자연히 도를 체득한 옛사람들과 짝이 됩니다. 그러므로 큰 스님들이 깨달아 들어가고 수행 증득해서는 설법좌를 얻어 법의를 걸친 뒤에도 스스로 살필 것을 말씀하셨으니 바로 사람들을 무간도(無間道) 속의 공부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생사의 일과 같이 큰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상당한 사람들이 죽는 날에 가서는 손발을 허우적거립니다. 이는 대체로 평상시에는 평온했으나 내내 거칠게 들뜨면서 티끌 인연을 따라 뒹굴다가, 시절이 도래하면 목이 마르자 우물을 파는 격이니, 그래서야 어떻게 해 내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 한 생에 일찌감치 돌이키지 않으며 백겁천생 부질없이 빗나갑니다. 이제는 이것이 있는 줄 알았으니 굳건히 앞만 보고 나아가며 모든 알음알이를 덜고 허망한 인연을 버리십시오. 영원히 가슴 속을 깨끗이 비워 한 티끌도 일삼을 것이 없게 해야 합니다. 혹 망상이 일어나거든 당장에 밀쳐 버려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본성은 항상 밝지만 그 밝음은 취할 수도 없고, 취모검과도 같이 늠름하니 뉘라서 감히 칼끝을 당하겠습니까. 그 자리는 일체 말길이 끊기고 마음 가는 곳도 없습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러, 성인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범부에 속해있는 것도 아니니, 어찌 일을 마친 범부가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부터 사람을 가르치고 훈계하면서 오직 무심에 힘썼을 뿐이니, 여기서는 참된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더럽고 기대고 분별하며 헤아리고 집착하는 모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심하여 도를 배우고 깨달아 들어가는 수행방편의 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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