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문덕거사(文德居士)에게 드리는 글


  소박 진실하게 땅을 밟고서 수행하여 알음알이를 정화하는 이것이 가장 잘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말로 한 발[一丈]을 설명함이 직접 한 자[一尺]를 행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성을 보아 이치를 깨달으면 망정과 생각을 모두 버리고 가슴이 툭 트여서, 일체의 모습을 여의고 원융하게 사무쳐 텅 비게 통합니다.

  그런 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여 물(物)·아(我)가 일여하고 삶과 죽음이 똑같고 부처와 중생이 평등합니다. 어묵동정,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서나 근원을 만나, 한 털 한 티끌이 모두 거두어들임이 됩니다. 그런 뒤에 매일 생활하는 가운데서 땅에 턱 버티고 앉은 사자와도 같은데 누구라서 감히 목전에 어리댈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하나의 모습, 하나의 행동에서 변행삼매(遍行三昧)를 얻으며, 근기와 기연을 이미 벗어버리고 나니 단번에 무심경계가 나타납니다. 실오라기만한 생각이라도 나기만 하면 다 끊어야 비로소 향상인의 살림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옛날 큰스님께서는 현묘를 참구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오묘한 마음을 먼저 깨닫고 나서 수행할 것 없는 수행을 하여, 깨달을 것도 없는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밖으로 달려 구할 것이 없고 그저 스스로 광채를 돌이켜 그대로 알아야 할 따름입니다.

  옛 사람이 기연에 투합했던 것을 보지도 못하였습니까. 강 건너편에 서서 부채를 흔들어 불렀으며, 찰간대를 거꾸러뜨리라 하였고, 한 손가락을 세웠으며, 실오라기를 입으로 불었고, 복사꽃을 보고 깨치기도 했으며, 대나무에 기왓조각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깨달아 증득한 곳들인데, 불법에 어찌 많은 곡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재주를 끊어 버리고, 그 자리에서 알아차린다면, 그것이 바로 안락하게 닦아 증득하는 경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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