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황태위영할(黃太尉鈴轄)에게 드리는 글


  이 도는 그윽하고 깊어 천지가 아직 형성되기 전, 중생과 부처가 나뉘지 않은 데까지 다하고 담연히 고요하여 모든 변화의 근본이 됩니다. 애초에 있고 없음이 아니어서 티끌 인연에 떨어지지 않고 찬란히 빛나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진실이라 할만한 진실도 없으며 오묘하다 할 만한 오묘함도 없이, 초연히 의식과 형상의 밖에 거처하므로 그것에 비교할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홀로 증득하고 민첩하게 빠져 나와 깨끗하여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연원을 꿰뚫고서 방편의 힘으로 단박에 그것만을 제창하여 최상의 근기를 제접하며 수행에 단계를 세우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이 종승(宗乘)은 교(敎) 밖에 따로 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도장으로 눌러 찍어서 문빗장을 열어젖히고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염화미소와 바늘을 던지고 불자를 들었던 것과 지팡이를 꽂고 선판(禪板) 궤안(机案)을 거절했던 일과 눈을 깜짝이고 눈썹을 드날렸던 일 등은 모두가 형식적인 도리와 말을 빌린 주장을, 별안간 지나치는 전광석화와도 같이 신속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천변만화를 하면서도 전혀 기댐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속박의 그물과 굴레를 끊어버립니다.

  그러나 준수한 부류만 허용할 뿐 어리석은 놈은 얘기할 것도 못됩니다. 바로 살인을 하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기개를 갖추기를 요하는 것이니, 하나를 깨치면 모두를 깨치고 하나를 밝히면 일체를 밝힌 다음에 훤출하게 통달하여 생사문제를 투철히 해결하여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높고도 원대한 식견을 쌓고 평소에는 칼끝을 노출하지 않다가 무심하게 돌출했다하면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그것은 대개가 뿌리가 깊숙하고 줄기가 견고하여 위음왕불 이전 공겁(空劫)의 저쪽을 간파한 나머지 바로 지금의 일상생활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미 이렇게 해 나갈 만한 힘이 있고 나면,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가되 완전한 자재로움을 얻습니다. 삼대아승지겁을 줄여서 일념(一念)으로 삼고 7일을 늘려서 일겁(一劫)을 만드는 것 따위도 오히려 별 것 아니거늘, 더구나 삼천대천세계를 시방 밖으로 내던지고 수미산을 겨자씨 속으로 집어넣는 것쯤이야 집안에서 일상 차 마시고 밥 먹는 정도일 뿐입니다.

  옛날에 배상국(裵相國)이 황벽(黃壁)스님에게서 종지를 얻은 일, 양대년(楊大年)이 광혜(廣慧)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은 일, 유마거사가 묘희세계(妙喜世界)를 한 손에 쥔 일, 방거사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마신 일들이 어찌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오직 단박에 이 큰 인연을 깨쳤을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이 도의 기본을 갖추고 나선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의 처분을 듣지 않고 용맹을 가지고 떨칠 수 있습니다. 대답하고 부르는 찰나에 착안하여 뛰어난 근기와 영리한 지혜를 운용하여 일체의 모든 것을 자기의 손아귀로 되돌려서 자유자재롭게 하면, 크게 통달하여 도와 덕을 간직하고 잘 실천한 옛 분들과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만 근원 근원 끊임없이 이어지게 해야만 영원히 사는 길 위의 쾌활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사는 말씀하시길 “마음이 모든 경계를 따라 움직이나 움직이는 곳은 실로 그윽하여라! 흐름 따라 성품을 알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움직이는 자리에서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체득하고 흘러 움직이는 그 때에 본성을 철저하게 보아 양쪽의 치우침도 초월하고 중간에도 처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거스름과 따름, 근심과 기쁨, 좋음과 싫음을 남겨 자신의 누림[自受用]을 가로막아서야 되겠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에 전하고 본성으로 본성에 도장 찍기를 마치 물이 물로 들어가듯 하고 금으로 금을 입히듯 합니다. 즐겁고도 쉽고 일상적이며 함이 없고 하릴없어서, 경계와 인연을 만나더라도 한 번의 응수도 필요치 않습니다.

  덕산스님의 방망이를 휘두름과, 임제스님의 “할”을 사용함과, 운문스님과 목주스님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번개가 치는 듯 하는 것들이 무슨 먼 데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정식에 휘둘리지 않아 색(色)을 덮고 소리를 누르며 고금을 초월하여, 모든 사물 위에서 통쾌하게 칼날을 휘두른 것입니다. 그래서 향상의 한 구멍을 열기만 하면 모든 성인이 나란히 아래에 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조과스님은 실오라기를 입으로 불었고, 구지스님은 한 손가락만 보였으며, 조주스님은 세 차례나 “차나 마시게”라고 했고, 화산(禾山)스님은 네 번이나 “북 칠 줄 아는군”하였으며, 운문스님은 “수미산”이라 하였고, 동산스님은 “삼 서근[麻三斤]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병, 소반, 비녀, 팔찌를 녹여서 하나의 금덩이로 만들고 소락제호(?酪醍?)를 휘저어 한 맛으로 만든 것으로서, 매우 미묘한 위없는 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엄양존자가 조주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질 않았을 땐 어찌합니까?”
  “놓아버리게.”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저더러 무엇을 놓아버리라 하십니까?”
  “보아하니, 놓아버리지 않았군.”

  그는 즉시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 어찌 신령하고 날카로운 이해로 말끝에 돌이켜 반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도직입으로 투철히 깨달아 마음을 잊고 생각을 끊은 완전한 해탈의 근원으로서, 본지풍광을 밟아 본래면목에 계합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한 구절로써 증득하기만 하면 천 구절 만 구절, 6근과 6진이 모두 함께 사라져서 심종(心宗)에 묵묵히 계합하는데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 뒤로는 독사와 사나운 호랑이를 항복받고 불가사의한 영험을 나타내니, 그 어찌 특수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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