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장직전(張直殿)에게 주는 글


  불조의 오묘한 도에 계합하려면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상근기가 알음알이를 잊고 몸소 참구하여 방편과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옳다. 당장에 무리에서 빼어나 텅 빈 마음으로 알아차려 곧바로 원명(圓明)하고 광대하게 비춰 천지를 꿰뚫고 생사의 근원을 사무쳐서 언어문자의 표방을 벗어나야 한다. 가슴 속이 말끔하여 한 생각도 생기지 않고 앞뒤가 끊겨 한 구절에서 당장에 알아차려 알음알이를 벗어나며, 진실하게 증득하여 끝내 의혹이 없어야 한다.

  옛날 칙 노덕[玄則]이 청림(靑林)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병정동자(丙丁童子)가 찾아와 불을 구하는구나."

  그러자 그는 바로 말 속에 들어가 도리를 만들어 말하였다.
  "병정(丙丁)은 불인데 다시 찾아와 불을 구하는 것은, 마치 내가 부처인데 다시 가서 부처를 물은 격입니다."

  법안(法眼)스님이 궁구하여 바름을 드러내는 데 이르러서는 그는 전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돌연 마음에 투합하게 되었는데, 법안도 역시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운운했을 뿐이다. 그가 크게 깨달은 것은 종풍에다 증험해서 비로소 회광반조할 줄 알아 다시는 잘못된 지견을 내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에 어둠에서 등불을 만난 듯,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듯하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성실하게 믿으면 천만억겁토록 길이 쓰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본래 말이 없으나 말을 의지하여 도가 나타나니 만일 이 도를 얻기만 하면 결코 말 위에 있지 않다. 뒤에 말이 있기만 하면 밑바닥까지 알아 곧바로 종횡무진으로 엎어지고 자빠져도 실제의 경지를 밟게 된다. 말을 따라 이해를 내지 않아서 드디어는 자유롭게 들고 나며 주고 뺏음이 연원과 근본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

  위로부터 크게 통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마당을 지나서 탁마 단련해서 비로소 행하여 지님을 감당하였다. 단지 푹 익은 곳은 놓아서 설게 하고 설은 곳은 만져서 푹 익혀, 그러기를 오래하면 대기와 대용을 얻는다. 일체의 천변만화를 보아도 모두 바로 알아버리고 믿고 다다르며 꽉 잡아 붙들고 작용하여 주인이 되는데, 무슨 빛을 놓고 땅을 흔들고를 가리겠는가.

  천백만억의 부처님이 온다 해도 깨달을 요(了)자를 쓸 필요가 없다. 암두스님은 말하기를, "사물을 물리치는 것이 상급이고, 사물을 좇아가는 것이 하급이다"하였다. 전투로 설명한다면 개개의 힘이 변통에 달려있는 것과 같다. 오직 향상만 굴릴 뿐 아래로는 떨어지질 않으니 바로 이것이 급히 착안할 곳이다.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으면 바로 눈동자를 바꾸어 버리라. 바로 통쾌하게 끊어버려야만 하니, 오랫동안 순수하게 익으면 유마힐 방거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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