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조(照)도인에게 주는 글(비구니)


  불문은 기특하여 지름길로 질러서 초월 증득하니, 반야와 빨리 상응하는 것으로는 선종(禪宗)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는 여래 최상승 청정선이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자 금색두타(金色頭陀 : 가섭존자)가 미소를 짓고 석가모니께서 열반묘심인 정법안장을 전한 때로부터 교(敎) 밖에 따로 행하고 외길로 심인(心印)만을 전하였다.

  그렇게 28대를 거쳐 달마가 서쪽에 와서는 인심(人心)을 곧바로 지적하여 견성성불하게 하였다. 범부나 성인이나 오래 수행했거나 아니거나를 논할 것 없이, 근기가 서로 투합하여 한 생각 투철히 벗어나면 다시는 삼아승지겁의 수행을 빌리지 않고도 곧바로 본래부터 원만하게 이루어진 청정 오묘한 조어장부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이 종지에 헤엄쳐 노니는 데는 큰 법기를 바탕으로 처음 뜻을 세워 걸음을 내디디면서부터 곧바로 높이 초월해야 한다. 이른바 바로 선 자리에서 성불하는 것이니, 잠시만 생각을 모으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바로 증득하리라. 앞뒤 경계의 구별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의지해서 얻는 것도 아니며, 그저 자기의 본분자리에서 맹렬하고 날카롭게 수행할 뿐이다.

  한 꾸러미의 실을 자름에 한번 자르면 모두가 끊어지듯이 본성의 신령함도 단박에 벗어날 뿐이다. 앞생각은 범부였지만 뒷생각은 성인이다. 헤아리거나 헤아리지 않거나 범부이거나 성인이거나 한결같아, 시방을 머금기도 하고 토해내기도 하면서 결코 정해진 방향이나 처소가 없다. 영가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 함이 없는 실상의 문에서
한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곧바로 들어감만하랴.

爭似無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법화회상에서 용녀(龍女)가 구슬 한 개를 바치고 즉시 정각(正覺)을 이루었으니, 어찌 한 생각 돌이켜 오묘한 과보를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참으로 이 법은 천지라도 덮어버리거나 싣지 못하며, 허공도 둘러싸지 못한다. 이것은 일체 중생의 근본에 간직되어 있으면서 일체의 의지처가 된다. 항상 적나라하여 어디고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

  다만 정식(情識)에 매이고 문견(聞見)에 막혀 허깨비를 마음으로 잘못 알고 4대(四大)가 자기몸뚱이인 줄 여기므로, 이 진정한 자체를 결코 증득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모든 성인들이 자비 원력으로 그것을 지적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근기가 있는 모든 중생에게 회광반조(回光返照)하게 하여 홑으로 드러내어 홀로 증득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 용녀가 바쳤던 보배 구슬은 도대체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가? 거량하자마자 바로 앉은 자리에서 투철하게 알아차린다면 결코 말 속에서 알음알이를 내거나 마음과 생각 속에서 형식을 만들지 않아서, 단박에 영산회상의 티 없는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리라. 옛날부터 오직 최초의 한 생각과 최초의 한 마디를 귀하게 여겼을 뿐이다.

  한 생각이 생기기 전, 소리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리에서 그대로 끊으면 천만 성인의 신령스런 기봉과 만 생령의 깨달음을 일시에 타파해버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씻는 듯이 자유 자재로움을 얻은 핵심적이고 오묘한 자리가 아니랴!

  방거사(龐居士)가 마조대사에게 물었다.
  " 만법과 짝이 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러자 마조대사는 말하였다.
  "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모두 마시고 나면 그때 말해주리라."

  이 공안을 말로써 많이 이리저리 따지고 방편과 경계를 지어서 이해하기도 하는데, 결코 종지를 이어받지 못했다 하리라. 요컨대 생철(生鐵)로 만든 놈이라야만 번뇌의 흐름을 거슬러 초월 증득하고 두 늙은이의 쇠로 만든 배를 뒤집을 줄 알리니, 무엇보다도 만길 절벽에 서게 되어야만 허다한 일이 없음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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