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심도자(心道者)에게 주는 글


  조사 이래로 이 하나의 큰 인연을 곧바로 지적하심은 바로 생사를 투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모름지기 지혜로운 상근기라면 말과 정식을 뛰어넘어 피아(彼我)·고저(高低)·강약(强弱)·영쇠(榮衰) 등 세속 인연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곧바로 자기의 근본자리에서 깨달아 본래 청정하고 텅 비고 고요하며 고금에 빛나며 지견(知見)이 아득히 끊긴 본분의 일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 이리하여 문득 홀로 서게 되면 삼라만상도 숨기거나 덮어버리지 못하며, 모든 성인이라 할지라도 견줄려고 하지 못한다.

  무심하고 호호탕탕하여 한 물건도 생각하지 않고 한 물건도 행위하지 않아서, 자연히 욕구도 없고 의지함도 없이 모든 삼매를 초월하는데, 그밖에 무슨 문호를 세운다느니 차별적인 조작을 한다느니 하겠는가.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천길 절벽에 선 듯하여 범부에 매이지도 않고 성인에 끄달리지도 말아야만 비로소 일을 마친 납승이라 하리라. 몸과 마음이 마른 나무나 썩은 기둥 같고, 불 꺼진 차가운 재 같아야만 참으로 쉬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예로부터 생각을 잊고 홀로 체득함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다. 체득하고 난 뒤엔 아견(我見)을 세우지 않고 자신을 뽐내지 않으면서 종횡으로 임운등등하여 바보 같고 우두커니 앉은 사람 같아야만 비로소 함이 없고 하릴없는 도인의 행리처라 할 만하다. 설사 30년, 50년이 지난다 해도 변하지 않으며, 천생만겁에 이른다 해도 그저 여여할 뿐이다.

  그래서 이른바 오래도록 하는 사람을 가장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결같이 이처럼 믿고 다달아서 철저히 깨닫는다면 세상을 제도하지 못할까. 번뇌생사의 구덩이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를 근심할 것이 없다. 이는 오직 당사자의 모든 6근이 맹렬한가 아닌가에 달려있을 뿐이니, 비로자나 부처님을 뛰어넘고 조사의 대(代)를 초월함도 어렵지 않다. 이것이 참으로 큰 해탈의 문인 것이다.

  달마조사께서 처음 소림(少林)에 오시어 9년을 면벽하면서 차갑게 앉아 있다가 깊은 눈 속에서 혜가(慧可)조사를 만났다. 체득한 것을 감변(勘辨)하여 증명하기에 이르러서 다만 세 번 절하고 제자리에 가서 서 있을 뿐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많은 말이 오가야만 되는 것이겠는가. 요컨대 대뜸 알아차려 처음부터 끝까지 실 끝이나 겨자씨만큼도 어김이 없어야만 한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여 때려 부술 수도 없고 모든 방편도 도달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런 뒤에 머뭄 없는 근본 속에서 일체를 흘러내며 융통하여 걸림이 없다. 모든 행위가 다 나의 오묘한 작용이며, 곳곳에서 사람들에게 못과 쐐기를 뽑아주어서 그들을 각자 편히 해주니, 어찌 요점을 살핀 것이 아니겠느냐.

  현사스님이 하루는 사람이 시체를 메고 지나가는 것을 보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죽은 놈 네 명이 산 놈 한 명을 메고 간다" 하였다. 만약 망정의 견해를 따른다면 현사스님과 자신이 서로 전도된 것이겠지만, 향상의 진정한 안목으로 견해를 여의고 망정을 초월한 자라면 현사스님의 사람을 위함이 몹시 친절함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투철히 벗어나려면 반드시 5음 18계(五陰十八界)를 벗어나야만 한다.

듣지도 못하였더냐. 옛사람이 했던 말을.

흰 구름은 담담히 떠가고
물은 푸른 바다로 흐르도다.
만법은 본래 한가하건만
사람 스스로 시끄럽구나.
白雲淡  水注滄溟
萬法本閑 而人自鬧

  과연 맞는 말이다. 이런 얘기를 언뜻 듣기만 해도 귀결점을 알아야만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 5음 18계 속에 갇히질 않아서 마치 새가 새장을 벗어난 듯 자유자재하리라. 그 나머지 모든 기용(機用)과 말은 단번에 끊어버려 그대로 쉴 뿐, 다시는 두 번째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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