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승선인(昇禪人)에게 주는 글


  참선의 요점은 한결같이 하는데 있으니, 억지로 조작하지 않고 다만 본분을 지켜야 한다. 모름지기 발밑에 투철하게 깨달을 곳이 있으니 본래 면목을 분명하게 보아서 본지풍광을 밟아야 한다. 애초부터 일상 행리처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속과 겉이 한결같아 자유롭게 생활한다. 특별난 짓을 하지 않고 보통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두고 배울 것이 끊겨 함이 없는, 한가하고 고요한 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자신이 처한 곳에서 마음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으니 설사 모든 하늘들이 꽃을 바치려 해도 길이 없고 마군 외도가 엿보려 해도 보이질 않는다. 이것이 바로 소박 진실하며 착실한 자리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르다 보면 세간법과 불법이 한 덩어리 되어 구별 없이 뒤섞여, 힘과 작용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는 것이니, 이 어찌 어려운 일이리오.

  다만 깨달아 들어가는 곳이 진실로 합당하지 못할까만을 염려해야 한다. 가슴 속에 무엇인가가 있으면 그것에 머물러 장애가 되니, 급히 깨닫고자 할진댄 휘돌려야 할 것은 마땅히 휘돌리면 마치 활활 타는 화로에 눈을 떨어뜨리듯 녹을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툭 트여 고요하여 큰 해탈을 얻으리라.

  다만 스스로 물러나 살펴보라. 선지식을 가까이 한 지가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 때문에 닦아온 경지에 분명하고 확실한 귀결점이 있느냐? 귀결점이 있다면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당장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 그대로 깨달으리라. 한 곳이 진실하기만 하면 천곳 만곳인들 어찌 그렇지 않겠느냐.

  조사께서는 오로지 사람들이 견성하기를 바랐고, 모든 부처님들은 그저 다만 사람들에게 마음을 깨치라고 했다. 심성이 참되어 순일 무잡하면 4대 5온과 6근 6진, 나아가 일체의 모든 존재가 모두 자기 신명을 놓아버릴 곳 아닌 데가 없다. 무심하고 호호탕탕하여 마치 해가 두루두루 비추어 허공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어찌 한계 있는 몸과 마음으로 도리어 자신을 구속하고 국한시켜 자유스럽지 못하게 하겠는가.

  옛 사람은 10년이고 20년이고 오로지 참구하여 뚫으려고만 했고, 한 번 뚫고 나면 그런 뒤에 계책 세울 줄 알았었다. 그러니 요즘이라고 해서 어찌 못하겠느냐. 다만 하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집착을 내지 말며 능력에 따라 인연을 만나면 투철하게 사무치지 못할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한결같음과 순일하게 고요함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비록 일과 인연에 관계하더라도 바깥대상이 아니니 이를 거두어 자기에게로 귀결한다면 바로 오묘한 작용이 된다.

  8만의 번뇌가 즉시에 8만의 바라밀로 뒤바뀌어 다시는 따로 선지식을 참례할 필요가 없다. 늘 생활하는 속에서 이루 다 셀 수 없는 불사(佛事)를 이룬다. 또 한량없는 법문을 두루 섭렵하더라도 모두가 자기 가슴 속에서 흘러나오니, 어찌 다른 것이 있으랴. 이른바 백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대천사계(大千沙界)에 온몸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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