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영상인(瑛上人)에게 주는 글


  도는 본래 말이 없으나 말을 통해야 도가 드러난다. 만일 진실로 도를 체득한 사람이라면 마음을 통달하고 근본을 밝혀서 곧바로 천겹만겹의 땀 냄새 밴 장삼을 벗어버리고 본래의 진정명묘하고 텅 비고 고요하여 담박하고 여여부동하고 진실한 바른 몸을 활연히 깨닫는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긴 자리에 이르러 본지풍광을 밟아서 다시는 많은 잘못된 깨달음과 지견, 나와 남, 옳고 그름, 사람과 죽음의 더러운 마음이 없다. 밝고 청정함을 드러내어 믿고 사무쳐서 옛사람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다름이 없다.

  무심하여 인위적인 조작이 없고 단단히 고집하지도 않아 허통(虛通)하여 자재롭고 원융하기가 끝이 없다. 시절에 맞게 밥 먹고 입으면서 평상에 계합하니, 이를 두고 '함이 없고 하릴없는 진정한 도인'이라 말한다.

  이는 근본이 이미 밝아졌기 때문에 6근이 순수하고 고요하여 지혜와 이치가 모두 그윽해지고 경계와 마음(神)이 모두 회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깊게 할 그 무엇도 없고 더 이상 오묘하게 할 것도 없게 된다. 나아가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스스로 알아서 두루 융통하니, 이를 두고 "자리에 앉아 옷을 입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후로는 스스로 살펴서, 결코 언구 속에서 살 길과 옛사람의 공안 사이에 매몰되거나 귀신의 굴속이나 검은 산 속에서 살 궁리를 하지 않는다. 오직 깨달아 들어가 깊이 증득하는 것을 요점 삼으면 자연히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평상의 하릴없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결코 죽은 듯이 앉아서 도리어 하릴없는 세계 속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부터 작가선지식과 고덕들은 몽둥이질과 할을 행하면서 종지를 세우고 부정과 긍정으로 밝히며, 조(照)와 용(用), 3현3요(三玄三要), 5위편정(五位偏正)을 시설하고, 준엄한 기틀로써 번개 말아 올리듯 하고, 말 이전의 격외도리로써 옆으로 끌고 바로 누르는 이 모든 일들이, 오로지 천만 사람도 붙들어 둘 수 없는 당사자의 활발하고 당당함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향상의 종승이 있는 줄 알게 하여 끝내 지시 설명하여 사람을 결코 구덩이에 매몰시켜버리진 않았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짓을 하는 놈으로서, 결코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투철히 벗어나 진정한 안목을 갖춘 납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먹다 남긴 국물이나 쉰밥을 먹으면서 노새 매는 말뚝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는 종풍을 매몰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생사문제를 투철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나아가 표방이나 격식, 알음알이를 가지고 후학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드디어는 한 봉사가 여러 봉사를 이끌고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격이 되니 어찌 작은 재앙이랴. 나아가 진정한 종풍을 보잘 것 없고 얄팍하게 보이게 하여 부처와 조사의 기강을 땅에 떨어뜨리는데, 어찌 애통하지 않으랴.

  그러므로 도를 배우려면 우선 올바른 지견을 지닌 스승 문하를 선택하고 그런 뒤에 짐보따리를 내려놓아야만 한다. 세월을 따지지 말고 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여, 들어가기 어려운 고충을 두려워하지 말고 투철하게 참구해나가야 한다.

  듣지도 못하였느냐. 목주(睦州)스님이 말하기를, "들어갈 곳을 아직 찾지 못했거든 모름지기 들어갈 곳을 찾아야 한다. 만약 들어갈 곳을 찾았다면 노승을 저버리지 말라"고 했던 것을. 오래도록 정성껏 한 뒤에 크게 겸추(鉗鎚)를 거치고 큰 용광로에서 단련해야만 한다. 매일매일 가까워져서 바탕이 은밀해지면 거기서 다시 오래도록 몸에 지녔던 것을 결판내야 한다.

  여여하게 깨달아 시종 끊임없이 세간법과 불법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사물마다에 몸을 벗어날 곳이 있어 티끌 인연에 떨어지지 않고 외물에 끄달리지 않는다. 시끄러운 시장의 네거리 속이거나 넓고 넓은 가운데서도 잘 노력해야 한다.

  오조 노스님께서는 평소에 가장 민첩하고 빠른 길로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매번 제자들에게 법문할 때마다 "물새는 조리니 물새지 않는 나무국자니 대승의 두레박 줄이니 소승의 돈꾸러미니 하고, 혹은 얼굴을 마주하여서 서로 기봉을 드러낼 때는 어떻게 건네주는가. 전좌(典座)여 어떠한 것이 현묘한 종지인가"하고 말했다. 벽 위에 돈을 걸어 놓고 학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이 가령 이렇게 철저하게 안다면 그대로 참선을 끝내도 되리라"

  이른바 오직 이 하나의 사실만이 그대로 시뻘건 심장을 굳게 덩어리지어서 한 실낱만큼도 가로막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하게 참구하여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면 비로소 강종(綱宗)을 거머쥐고 정법안장을 전수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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