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유상인(逾上人)에게 주는 글


  뜻을 품은 사람이 결정코 이 큰 일에 믿고 들어가려 한다면 모름지기 이제껏 지혜와 총명으로 이해하고 알았던 것을 몽땅 버려야만 한다. 그리하여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가슴 속을 허허로이 텅 비우며, 모든 것을 다 몰라서 천 번 쉬고 만 번 쉬어야 한다. 단박에 본지풍광을 좇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 앞뒤가 모두 끊겨서,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단박 가지런히 자르듯 철저하게 스스로 깨달아 금강정체에 계합해야 한다.

  비록 겁화(劫火)가 활활 탄다 해도 애초에 조금도 달라짐이 없으니, 믿어서 다다르고 꽉 붙들어 두며 작용하여 주체가 되어, 하나를 하면 모든 것을 하고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되어야 한다. 잠깐 동안에 몸을 옮기고 걸음을 옮기는 등의 모든 행위가 완전히 하나의 바탕으로 귀결하는데, 다시 무슨 세간법과 불법을 말하랴.

  두두물물(頭頭物物) 부딪치는 곳마다 있는 그대로여서 바로 불조(佛祖)와 다름이 없으며, 뭇 생령들과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근본이 이미 밝아서 밝히지 못할 어둠이 없기 때문이니, 손 가는 대로 집어내 오고, 발걸음 가는 대로 가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여도 원래 그가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곳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이를 두고 "크게 베푸는 문을 연다"고 한다.

  갖가지 오묘한 작용을 종횡으로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는다. 불성을 분명히 증득하여 긴 시간 끊임없이 해야 하리라. 한 번 체득하면 영원히 체득하여 실천이 순숙하였으니, 어찌 요점을 살펴서 힘을 얻은 곳이 아니랴. 이처럼 믿고 들어가기만 한다면 분명히 남을 가르치지는 않으리라.

  어떤 스님이 설봉스님에게 물었다.
  "저는 이제 막 총림에 들어왔습니다. 스님께서 들어갈 곳을 지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잠깐 티끌처럼 몸을 부숴버릴 수만 있다면 결코 스님의 눈을 멀게 하진 않겠다."

  자, 옛사람이 이처럼 했던 의도는 어느 곳에 있겠느냐? 가령 참구하는데 있는 것이라면, 회피할 수 없어서 모름지기 들어갈 길이 분명코 있다 하리라. 다만 그저 말이나 따라가고 의미만을 좇는다면 적지 않게 빗나가리라. 나도 벌써 눈썹을 아끼지 않느니라.

  어떤 스님이 석두(石頭)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석두스님은 말하였다.
  "나무토막이지."

  다시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하고 묻자 석두스님은 말하였다.

  "푸른 벽돌이다."

  기괴하도다, 옛사람은 이처럼 유난히도 단도직입적이어서 겨를도 없었음이여! 이를 두고 이른바 "매우 적실하고 가까워서 지견(智見)이 있어 충분히 계교를 부릴 사람이라도 마치 은산철벽에 가로막힌 듯하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입에 붙은 말을 종승(宗乘)으로 오인하여 더더욱 멀게 된다. 그러므로 진실한 도인은 순박함에 힘쓸 뿐, 지견을 내지 않고 곧바로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는 것도 벌써 흙 위에 진흙을 수백 겹이나 더하는 격이니, 나에게 석두스님의 본분스님의 본분소식을 되돌려주는 것만 못하다.

  삼조(三祖)스님께서도 말하기를, "급히 상응하려느냐. 다만 불이(不二)라고 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나 같으면 "불이(不二)라고 해도 벌써 둘이 되어 버렸다"라고 하리라. 참구하라.

  조주스님이 노파를 감파해 버린데 대해 총림에서는 천만 가지로 의론하면서 수많은 견해를 짓는다. 이야말로 저들 고인이 자재로이 깨끗한 곳에 서서 그대들이 진흙구덩이 속에서 출몰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하리라.

  마조스님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의 물을 모두 마신 뒤에야 비로소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 하였다. 진실로 이 어른은 천하 사람을 밟아 버렸다 하리니, 무심하게 꺼낸 한마디 말이 문득 무한한 지견을 짓게 하였다. 이 늙은이의 까다로운 언구[葛藤]를 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곧바로 참구를 그만두라고 청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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