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실선노(實禪老)에게 주는 글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 한 번에 훌쩍 뛰어 증득하여 모든 성인과 같은 길을 갔다. 그리하여 놓아서 행하게 하고 잡아서 머물게 하며, 지어서 주인이 되게 하여 전체가 그대로 이루어지니, 단련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완전하게 익었다.

  그런가 하면 위음왕불 이후에는 비록 자기에게 높이 초월한 곳이 있어 곧바로 알아차려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반드시 스승을 의지하여 결택해서 인가를 받아 법기(法器)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마군의 재앙이 있어 정인(正因)이 파괴되리라.

  그러므로 조사가 계신 이래로 스승 제자 간에 전함에 있어서는 스승의 법을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 일은 세간의 지혜나 변론 및 총명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견문각지에 구애될 것이 아니다. 참으로 용맹한 대장부의 뜻과 기상을 지니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좋은 벗과 선지식을 만나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명의 껍데기를 부술 수 있으랴.

  자주자주 참당하여 묻고 오래도록 한결같이 하다 보면 시절 인연이 익어 단박에 통 밑이 빠진 듯 확연하게 깨달으리라. 그런 뒤에 정성을 다해 결탁하여 증거를 받으면 자연히 마치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가는 배에서 노 젓는 수고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이, 또한 바늘과 겨자씨가 서로 투합하듯 하리라.

  이미 종지를 체득한 뒤엔 면면히 지니고 계속 끊임이 없게 하여 성태(聖胎)를 길러야 한다. 설사 나쁜 인연이나 경계를 만난다 해도 바른 지견에서 나오는 선정의 힘[定力]으로 이를 원융하게 섭수하여 한 덩이를 이룬다면 생사의 큰 변고라 할지라도 움직이기엔 부족하다. 자기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길러가다 보면 함이 없고 하릴없는 큰 해탈인이 되는 것이니, 이 어찌 할 일을 끝내고 수행하는 일을 모두 마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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