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민지고(民知庫)에게 주는 글


  민선인(民禪人)은 금관(錦官) 대자사(大慈寺)의 전법사(傳法師)인 소(昭)율사의 법손이다. 머리를 깎자마자 즉시 가업을 익혀 사분율을 배웠다. 이윽고 포건(布巾)을 벗어던지고 율법을 떠나 스스로 청정하려 하여, 지팡이를 어깨에 걸머지고 남쪽에 유람하여 조사가 서쪽에서 온 종지를 물으려고 내가 살고 있는 협산(夾山)에 와서 서로 만났으며, 도림사(道林寺)에 머문지 오래였다.

  내가 장산(蔣山)을 맡게 되었을 때는 더욱 확실하게 묻고 참구하였다. 깨닫는 문제에 있어선 스스로 지해(知解)를 털어버리고 온전한 기틀로 곧바로 꿰뚫어야 하는데, 인연 따라 묻고 대답할 때마다 한번에 단도직입하여 상당히 공부가 쌓였으니 기뻐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근기로써 다시 부지런히 노력하고 마음[志]을 쉬어서 더없이 깊고 오묘한 곳에서 크게 쉬어버리고 완전히 안온한 곳에 도달해야 한다. 가는 티끌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한가로운 경지만을 지켜 범부와 성인도 헤아릴 수 없게 하고 모든 덕도 거느리지 않는 뒤에야 의발을 맡길 만한 것이다.

  암두스님은 말하기를, "사물을 물리치는 것이 상급이고, 사물을 쫓는 것이 하급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경계와 모든 인연, 나아가 고금의 가르침과 임기응변에 이르기까지 만약 자기의 근본이 텅 비고 고요하여 두루 밝고 고요히 비추면[圓明寂照], 모든 것이 다 나에게 간여해온다 해도 금강왕 보검으로 단칼에 잘라버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늠름하고 신령한 위엄으로 일체를 앉은자리에서 끊어버려,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나리니 어찌 여유자작하지 않으랴.

  만일 근본을 밝히지 못하고 약간이라도 의심하고 머뭇거린다면 휘둘림을 당하여 분명하지 못할 것은 뻔하니, 어떻게 남의 굴림을 면할 수 있으랴. 남에게 딸려가다 보면 끝내 자유로울 리가 없으리라. 지극한 도는 간단하고 쉬우니 다만 물리치느냐 쫓아가느냐에 달렸다. 도를 잘 체득한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해야 된다.

  옛사람은 이 하나의 일을 위해서 그대로 온몸을 희사하기도 하고, 눈 속에 서 있기도 했으며, 방아를 찧기도 했고, 심장과 간을 팔기도 했다. 양쪽 팔뚝을 태우기도 했고, 훨훨 타는 불무더기 속에 몸을 던지기도 했고, 온몸이 일곱 토막으로 잘리 우기도 했으며, 몸을 호랑이 먹이로 바치기도 하고 비둘기를 구하기도 했으며, 머리를 희사하고 눈을 보시하기도 하였다. 이런 백천 가지의 경우라도 모두가 간곡하고도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깊이 도달하지 못한다.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옛사람을 본받아 안자(顔子)처럼 되기를 바라고 인상여(藺相如)를 흠모해야 된다.

  원만 담연하고 텅 비어 응연(凝然)한 것은 도의 체(體)이고, 펴기도 하고 오므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는 것은 현묘한 작용[用]이다. 훌륭한 솜씨로 칼을 휘두르고 능히 조심하여 지키되, 마치 구슬이 소반에 구르듯, 소반이 구슬을 굴리듯 하여 잠시도 허망함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세간법이니 불법이니 구분을 하지 않고 그대로 한 덩어리를 이루니 이른바 "부딪히는 곳마다 그를 만난다"한 것이 그것이다. 종횡으로 출몰하되 애초부터 외물(外物)이 없다. 적나라하고 자유자재하여 본분의 일로써 인정(印定)하고 두두물물마다 밝고 묘연하다.

  그러니 어느 곳에 다시 얻고 잃음, 옳고 그름, 좋고 나쁨, 길고 짧음이 있으랴. 다만 자기의 바른 안목이 환하게 밝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양변에 떨어지게 되면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듣지도 못하였느냐. 영가스님이 말하기를, "상근기는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알아버리나,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더욱 믿지 못 한다"고 했던 것을.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은 그저 통발과 그물에 불과할 뿐이니, 이를 의지하여 진리에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확연하고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면 그 바른 자체(正體) 위에 모든 것이 원만하게 구비된다. 그러니 불조의 말씀을 모두 그림자나 메아리 정도의 일로 보아서, 결코 받들어서는 안 된다.

  요즘 들어 참선하는 많은 납자들이 종지(宗旨)가 되는 법(法)에 근본하지 않고 그저 언구(言句)만을 지니고 간택할 뿐이다. 그리하여 가까움과 멂을 논하고 얻음과 잃음을 분별하며, 뜬 물거품 위에서 참다운 견해라고 생각하여 이를 과시한다. 꽤 많은 공안을 잘도 가려내어 제방에 있는 5가 종파(五家宗派)의 말을 묻고 해석하나, 한결같이 알음알이[情識]에 빠져 그 자체[正體]를 미혹하였으니, 진실로 가련하다.

  참되고 바른 종사가 있어 눈썹을 아끼지 않고 위에서와 같은 잘못된 지견을 떠나라고 권하면 도리어 반대로 "마음 씀이 뒤바뀌었다"고 하면서, 단련받기를 그만두고 더더욱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작가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늙어지도록 쓸모없는 물건이 될 뿐이라고 하는 것이니, 요점을 살피는 데에서는 한 수도 쓰지 못한다. 살 속에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귀결점을 알겠지만, 혹 주저하는 경우에는 붙잡을 곳[鼻頭]을 잃으리라.

  7 불(七佛) 이전에는 과연 어떠했는가? 곧바로 모름지기 빡빡하고 긴밀하게 머리의 피부에 달라붙어서 분명하고 역력하게 이 한 덩이의 심전지(心田地)를 알아차려 오래도록 안오 면밀하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알고 물러나서 마침내는 "나는 견처가 있으며, 나에겐 오묘한 이해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실낱만큼이라도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견해의 가시가 있게 되면 그 무게가 태산보다 더하기 때문이어서, 이런 것은 옛부터 결코 서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불께서는 연등부처님에게 무법(無法)으로써 수기(受記)를 얻으셨으며, 노(盧)씨는 황매산에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로써 의발을 직접 받으셨다. 생사 순간에 이르러서 조금이라도 짊어진 것이 있었다하면 곧 신령한 거북이가 꼬리자국을 남기는 격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청정하다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극단을 모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있느니 없느니, 견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들은 마치 벌겋게 타는 화로에 한 점의 눈[雪]을 떨어트리는 것과 같아서, 하루 종일 철두철미 쇄쇄낙락하게 하여 모든 성인도 길을 함께 하지 않는 이런 곳에 노닐면서, 당장에 순숙하게 하여 배울 것이 끊어지고 아무 하릴없으며 천만 사람도 잡아둘 수 없는 진실한 도인을 자연히 성취한 것이다.

  조주스님은 납승을 보기만 하면 앞으로 가까이 오라고 불러서, 그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가면 그냥 가라고 했다. 얼마간 힘을 덜어 알아차린다면 십분 성취한 것이겠지만, 이러쿵저러쿵 한다면 지견(知見)만 생기리라.

  옛사람은 큰 자비를 갖추고 있었으니, 사람들이 정면에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바르게 방편을 열어 들어갈 길을 열어 주었다.

  예컨대 고제(古提)스님의 경우, 납자들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대뜸 "물러가거라! 물러가! 너에게는 불성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후에 오직 앙산(仰山)스님이 나와서 그 분명한 소식을 알았다. 그러니 요즈음의 경우, 이것을 끄집어내서 참학하는 자들에게 묻기만 하면 열이면 열 모두 멍하니 그만 그 말 속에서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단박에 깨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니, 만약 산 경계[活處]에 의거한다면 어떻게 토로해 내겠는가. 남의 말 따르는 것을 무엇보다 조심해야 된다.

  영운스님은 복사꽃을 보고 깨달아 게송을 지었고, 현사스님은 "그는 아직 철저히 깨닫지 못했다"고 하였으며, 어떤 노파가 오대산 가는 길을 가르쳐 주자, 조주스님은 되돌아와서 노파를 감파했다고 하였다. 총림에서는 이것을 갖가지로 따지면서 시끄럽게 떠들 뿐이니, 이야말로 옛사람들이 말한 '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과 같다 한 것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문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므로, 문에 들어갔으면 그만이지 문 두드리는 기왓조각을 대단한 것인 양 집착하겠는가. 명확한 뜻은 곧바로 드러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귀결점이 어느 곳에 있느냐? 도리를 알겠는가?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느니라.

  무성한 풀숲에 들어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손 가는 대로 풀을 집어내 오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데야 어찌하랴. 참으로 착안이 바르고 손놀림이 정확하다면 한 줄기의 풀로도 장육금신(丈六金身)을 만들게 할 수 있으니, 더구나 그 밖의 변화야 말해 무엇하겠느냐.

  근본이 이미 밝아지고 나면 일상생활 속에서 밭을 매고 땅을 개간하며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들이 모두가 협산(夾山) 늙은이와 직접 화답(和答)하는 것이며, 지장(地藏)스님이 연설하던 일과 똑같은 범행(梵行)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익히고 실천하여 비로봉에 높이 걸터 앉아 이 정법(正法)을 전하니, 어찌 현묘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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