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해지욕(諧知浴)에게 주는 글


  이 큰 법은 삼세 모든 부처님이 함께 깨닫고 역대 조사가 함께 전하여 똑같은 도장으로 인가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아 성불케 하며, 문자나 말을 세우지 않았으니 이를 두고 교(敎) 밖에 따로 행하며, 단독으로 심인(心印)을 전한다고 한다. 만약 말과 교리로써 설명하며 단계를 세우고 격외(格外)니 격내(格內)니를 논한다면 근본 종지를 잃어버리고 옛 성인을 저버리게 되리라.

  요컨대 처음 입문할 적부터 곧바로 본분인(本分人)을 만나서 그대로 근원을 알아 뒤로 물러나 자신에게 나아가야 한다. 철석같은 마음으로써 종전의 망상과 견해, 세간의 지혜와 총명, 너와 나, 얻음과 잃음 따위를 밑바닥까지 뒤집어 일시에 놓아 버려야 한다. 곧바로 마른 나무, 불 꺼진 재처럼 하여 망정과 견해를 모두 없애 정나나적쇄쇄(淨  赤灑灑)한 곳에 도달하여 활연(豁然)히 계합 증득하면, 위로부터의 모든 성인과 실낱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진실로 믿어서 다다르고 분명하게 봐서 사무친다면 이것이 바로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다. 여기서 다시 일념이 만 년이 되게 하고 만년이 일념이 되게 하여 하루 종일 순일하여 잡됨이 없어야 한다. 실낱만큼이라도 일어나거나 꺼짐이 있기만 하면 25유(二十五有)에 떨어져 빠져나올 기약이 없으리라.

  죽기 살기로 물어뜯어 끊어버린 뒤에야 바탕[田地]이 안온하고 은밀하리라.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지위에 들어가지 않아야만 비로소 새가 새장을 벗어난 것처럼 스스로 쉬고 스스로 깨달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옷을 입을 수 있으리라. 그러면 백 번 단련한 순금처럼 일거일동이 넓고 한가로워 6근·6진의 생사와 현묘한 경(境)·지(智)가 마치 끓는 물에 눈을 뿌리는 것과도 같으리라. 마침내는 스스로 시절을 알아 다시는 본분을 벗어나지 않으니, 이를 일러 무심한 도인이라 이름한다. 이렇게 닦고 증득하며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 이렇게 실천하게 한다면, 어찌 도를 닦는 요점이 되지 않으랴!

  옛사람이 이 하나의 인연을 위하여 어찌 침식을 잊는 정도에만 그쳤으랴! 머리·눈·골수를 희사하고, 팔을 끊고 방아를 찧기까지에 걸핏하면 30년, 20년을 지냈다. 예컨대 암두(巖頭)·설봉(雪峰)·흠산(欽山)스님의 경우, 총림을 함께 돌아다녔으나 각자 한 가지 일을 잡고 부지런히 노력하였다. 동산(洞山)을 아홉 차례 갔었고 투자(投子)스님에게 세 번 갔었는데, 가는 곳마다 하룻밤 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버린 적이 없다. 반드시 서로 거론하여 비교해주고 서로 갈고 닦아 주더니, 신풍산(新豊山)에서 깊숙이 계합하여 활연히 종지를 깨달은 것이다.

  덕교(德嶠 : 덕산)스님은, 그의 걸음걸이와 체재를 보건대, 불법문중의 용과 코끼리라고 할 만하다. 후학들은 그들의 자취를 우러러, 세월을 헛되게 보내어 옛날의 훌륭했던 어른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 천태덕소(天台德韶)국사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다. 총림을 행각할 때 가는 곳마다 기연이 맞아서 스승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금릉(金陵) 땅 청량사 대법안(大法眼) 스님의 회상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묻고 참례하는 것은 게을리 하고 오직 열심히 시봉을 들며 방장실에서 옷깃을 여미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루는 대중 참당(參堂)에 따라갔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계근원의 한 방울 물입니까?" 그러자 "이것이 조계근원의 한 방울 물이다"라고 대답하는 말을 듣고, 전에 깨닫고 이해했던 것이 마치 얼음 녹듯 풀려 큰 안온함을 얻었다.

  이로써 배워서 이해하는 것은 사람을 피곤케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마디, 한 구절, 한 기틀과 한 경계에서 아는 것은 다문(多聞)을 더할 뿐이니. 궁극의 지극한 실재 자리에 이르려 하면 모름지기 통 밑바닥이 빠져버리듯 해야만 하리라. 이 일은 결코 말 가운데 있지 않다. 이를 집착하고 기억하여 자기의 견해로 삼는다면, 마치 그림 속의 떡과 같으니 어떻게 배고픔을 달랠 수 있으랴.

  그러나 크게 통달한 인재는 진실한 이치를 초월하여 증득한다. 나아가 기연에 투합할 경우에는 말 사이에 있으면서 그 자취에서 멀리 벗어나 기틀이나 경계 등의 그물로 그를 잡아둘 수 없다. 예컨대 석두(石頭)스님은 약산(藥山)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 아무것도 하질 않습니다."
  " 그렇다면 한가하게 앉아 있는 거로군."
  " 한가하게 앉아 있는 것도 하는 겁니다."

  석두스님이 다시 물었다.

  "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무엇을 안 한다는 건가?"
  " 모든 성인도 모릅니다."

  석두스님은 이에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이제껏 함께 있어도 이름도 모르고
임운 등등이 서로 함께 그렇게 갈 뿐이네
예로부터 현인들도 알지 못했거니
경솔한 범부가 어찌 밝히랴.

從來共住不知名 任運相將只 行
自古上賢猶不識 造次凡流豈可明

  이 같은데 어찌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의 말이 아니랴. 기연으로 헤아리는 말로서야 어떻게 그를 구속할 수 있었으랴. 만일 이치자리[理地]를 밝히지 못했다면 가슴 속에 물건이 막힌 듯 질문을 해도 마치 모포 위에서 고양이를 끌 듯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이 모든 경계를 따라 움직이나
움직인 자리마다 실로 오묘하구나
흐름을 따라 본성을 알아차리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총림의 형제들이 찾아와 법을 물을 때, 맨 처음에는 정인(正因)이 분명히 있어서, 생사의 일이 큰데도 스스로의 일을 밝히지 못하는 것을 선지식에게 고백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찌 흔히 말하는 명예와 지위를 위하고, 나의 능력과 나의 우수함을 내보이기 위해서이겠는가!

  그러나 만일 시종일관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면 자기 일을 밝히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는다. 나아가 오랫동안 가까이 하다가 끝내는 자기의 분상에 털끝만큼도 서로 상응하는 곳이 없게 되면, 문득 이러쿵저러쿵 따지며 상대방 견해를 시비하고 아견을 늘리면서 빠져나올 곳을 찾는다.

  그렇게 하면 뒷날 한줄기 향으로 감히 화상을 저버리진 않았다 하겠으나, 최초의 정인(正因)을 잃어버리고 마군의 경계에 떨어진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권속의 장엄은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른다"하였다. 이미 짚신을 다 밟아 떨어뜨린 무리들이라면 이제는 응당 처음의 마음을 깨달아 생사 벗어나기를 기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각자 힘써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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