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진불眞佛(2) 참 부처님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문인들은 잘 있거라. 내가 게송 하나를 남기리니 ‘자성진불해탈송(自性眞佛解脫頌)’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뒷세상에 미혹한 사람이 이 게송의 뜻을 들으면 곧 자기의 마음, 자기 성품의 참부처를 보리라. 너희에게 이 게송을 주면서 내 너희와 작별하리라.”
  이제 육조 스님이 대중한테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대목입니다.

  게송을 말씀하셨다.
진여(眞如)의 깨끗한 성품(淨性)이 참부처(眞佛)요
  진여는 우리 자성자리를 얘기합니다. 그 자성자리의 깨끗한 성품, 깨끗한 성품이 뭔고 하면 ‘너다-나다’ ‘부처다-중생이다’ ‘열반이다-생사다’ 이런 것이 없는 그 자리가 깨끗한 성품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세탁기 역할을 합니다. 이게 한번 깨끗해지는 것을 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 세탁기가 자동으로 작동이 되어서 부처가 오더라도 싹 세탁해버리고, 중생이 오더라도 세탁해버리고, 그 세탁된 자리에서 자유자재하게 작용을 일으킵니다. 세탁된 그 자리가 응무소주應無所住라면 그 자리에서 그런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끄달리지 않고 자유자재하는 것을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여정성眞如淨性, 이게 세탁기입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어져 버립니다. 다 세탁해버립니다. 진여정성이 진짜 부처님입니다.

  삿된 견해의 삼독(三毒)이 곧 참마군이니라.
사견삼독邪見三獨, 이게 뭡니까? ‘있다-없다’ ‘부처다-중생이다’ 해 가지고 거기에서 탐진치가 일어나는 겁니다.

  삿된 생각 가진 사람은 마구니가 집에 있고,
바른 생각 가진 사람은 부처가 곧 찾아오는도다〔正見之人佛則過〕.
  성철 스님이 부처가 곧 찾아온다고 새겼는데 이건 ‘則過’ 원문 그대로 새겨도 좋습니다. 부처인 즉 곧 지나간다. 성철 스님은 이걸 무주無住로 본을 삼아라 하는 식으로 해석을 안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글자 그대로 새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견邪見에 떨어져 있으면 모든 걸 집착하거든요. 그래서 집착하는 것은 마구니가 집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된 자리도 머무르면 부처가 잘못되어 버려요.
  《금강경오가해》 ‘야부송冶父頌’에 보면, “부처 있는 곳에 주하지 말고〔有佛處 不得住〕, 부처 없는 곳에 가서는 빨리 지나가거라”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앞에 보면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을 삼아라’라고 했잖아요. 부처자리에도 주住하면 안 돼요. 어디든지 주하면 그건 병이에요.

  성품 가운데서 삿된 생각인 삼독이 나나니,
곧 마왕이 와서 집에 살고
바른 생각이 삼독의 마음을 스스로 없애면
마군이 변하여 부처 되나니, 참되어 거짓이 없도다.
  우리가 마구니를 쫓아내고 부처를 맞이하는 게 아니고, 마구니가 변해서 부처가 되는 거지요. 그러면 망상이 변해서 지혜가 되고 반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중생이 부처가 되고 부처가 중생이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중생을 쫓아내고 부처를 맞이하는 게 아니고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겁니다. 보살진성菩薩眞性 경계는 쫓아내는 게 아니라, 마구니가 변해서 부처가 되고 번뇌가 변해서 지혜가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다.

  화신化身과 보신報身과 정신淨身이여,
세 몸이 원래로 한 몸이니
  여기 정淨이라고 썼는데 본래 법法이지요. 법이 깨끗한 거고 양변을 여읜 자리이니까. 이 정신淨身,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게 자성자리거든요. 화신化身은 거기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말하고 보신報身은 그렇게 일어날 수 있게 덕성을 갖추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보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전부 우리 마음 속에 있으니까, 이 삼신이 각각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몸입니다.

  만약 자신에게서 스스로 보는 것을 찾는다면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한 씨앗이니라.
  이 몸 가운데 우리가 삼신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 삼신 몸 가운데 삼신이 보는 것을 찾으면, 곧 그것이 부처, 보리菩提의 원인이니라. 그러니까 이 삼신 가운데서도 법신을 찾아보는 거지요.

  본래 화신으로부터 깨끗한 성품〔淨性〕 나는지라.
깨끗한 성품은 항상 화신 속에 있고
성품이 화신으로 하여금 바른 길을 행하게 하면
장차 원만하여 참됨이 다함 없도다.
  화신은 이렇게 작용하는 겁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할 때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겁니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淸淨因〕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이 없다.
  《수심결》에 보면, 새 소리를 듣느냐? 듣습니다. 듣는 놈을 돌이켜 들어 보라. 거기에 뭐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없음 자리가 그게 청정인淸淨因이거든요. 그러면 음욕을 일으키는 놈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음욕을 일으키고 있는 그놈을 돌이켜 생각해서 우리가 안으로 비춰 보면 거기는 또 깨끗해지는 거예요. 우리는 껍데기만 보고 저거는 더럽다 나쁘다 생각하지만 그 본질은 항상 깨끗한 겁니다. 또 음욕을 없애고 그 깨끗한 성품을 찾으려고 하면 그건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세상에 더럽다 깨끗하다, 좋다 나쁘다는 없어요. 전부 평등합니다. 그 본질을 보면 더럽다고 하는 것과 깨끗하다는 게 본질이 같아요. 평등해요.

  다만 성품 가운데 있는 다섯 가지 욕심을 스스로 여의면
찰나에 성품을 보나니, 그것이 곧 참이로다.
만약 금생에 돈교頓敎의 법문을 깨치면
곧 눈앞에 세존을 보려니와
  앞에도 나왔습니다. “극락세계를 보여줄 테니 너희가 보겠느냐?” 하니까 위자사韋刺史를 비롯한 모두가 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봐라. 본 사람은 의심하지 말아라” 하고 육조 스님이 얘기했거든요. 그리고 유관唯寬 스님 같은 이가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까 “니 눈앞에 있지 않느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돈교법을 깨달으면 눈앞의 부처님을 봅니다.

  만약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고 할진대는
어느 곳에서 참됨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도다.
  우리가 수행해서, 무엇을 닦아서 부처되는 게 아닙니다. 착각을 깨면 그대로 부처입니다. 닦을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착각을 깬다는 말을 닦는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만약 몸 가운데 스스로 참됨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곧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음이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그러니까 여기도 참된 것을 구하지 않고 밖에서 부처를 찾는다. 우리는 밖에 있는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 밖에 있는 걸 자꾸 찾고 있거든요. 제일 귀중한 게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이니까 돈입니다. 그리고 명예. 젊은 사람들은 몸짱, 얼짱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게 전부 밖에서 찾는 거예요. 밖에서 찾는 것으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안에서 찾아요. 이게 부처님 법입니다.

  돈교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
이제 세간의 도를 배우는 이에게 알리노니,
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크게 부질없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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