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진불眞佛(1) 참 부처님

 
  법해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이제 가시면 무슨 법을 부촉하여 남기시어, 뒷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부처님을 보게 하시렵니까?”
  여태 돈법頓法에 대한 얘기를 계속 했거든요. 법해 스님이 다시 반복해 질문한 것은 법에 대한 이해가 얕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셔야 되지, 법해 스님이 몰라서 물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들어라. 뒷세상의 미혹한 사람이 중생을 알면 곧 능히 부처를 볼 것이다.
《원각경》<보현보살장>에 “지환직각知幻直覺”이라고 있지요? 환幻을 알면 곧 깨달음이다, 그런 말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중생을 알면 능히 부처를 보는데, 실제 우리는 중생을 모르고 있지요. 왜 내가 중생인지,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중생은 우리는 껍데기 형상만 보기 때문에 중생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를 만든 본질, 내가 말한 가마니나 새끼나 짚신이 껍데기라면, 그것을 만든 재료인 짚을 보게 되면 부처거든요. 그래서 중생은 그 껍데기만 보지, 알맹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 중생이다. 이렇게 하면 그 안은 자체가 부처입니다. 중생이라는 걸 아는 그 자체가 부처예요.

  만약 중생을 알지 못하면 만겁토록 부처를 찾아도 보지 못하리라.
우리가 이제 껍데기만 보고 본질은 못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부처가 되지, 껍데기만 계속 사실이고 그것이 진짜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중생도 그건 모르는 거고, 그분은 만겁을 지내더라도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내가 지금 너희로 하여금 중생을 알아 부처를 보게 하려고 다시 ‘참부처를 보는 해탈의 노래’를 남기리니, 미혹하면 부처를 보지 못하고 깨친 이는 곧 보느니라.”
  껍데기만 나라고 집착하면 그건 중생이고, 껍데기와 그 껍데기를 만든 본질 그 자리가 바로 연기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 본질을 본다는 이런 얘기입니다.

  “법해는 듣기를 바라오며 대대로 유전하여 세세생생에 끊어지지 않게 하리이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들어라. 내 너희들을 위하여 말하여 주리라.
만약 뒷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離衆生無佛心〕.
  여기에서도 똑같은 얘기입니다. ‘껍데기만 보고 작용하는 것만 보고, 비작용非作用 본질 자리를 보지 못하면 그건 중생이다.’ 이렇게 중생을 이해하면 그 자체가 부처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있음을 말미암아서 부처도 아는 거니까 중생을 여의고는 부처의 마음도 없다.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도 있는 거다. 이 말을 이분이 묘하게 잘 하신 겁니다.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거지요. 다만 깨닫고 못 깨달은 그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 당체當體는 똑같다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그 존재원리가 바뀌는 게 아니고 그대로 있다 이겁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본래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우리의 존재원리는 부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우치愚癡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이 어리석은 것도 우리가 잘 해석해야 됩니다. 일상적으로 어리석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어리석은 것은 ‘있다-없다’ ‘나다-너다’에 집착한 게 어리석은 거예요. 육조 스님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연기緣起를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있다-없다’ ‘너다-나다’를 초월해서 그 자리에서 모든 걸 평등한 걸로 보고, 헐뜯기나 칭찬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있다-없다’ ‘너다-나다’ 하는 것을 초월한 그 자체가 부처자리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중생이 부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생이 부처가 되고 부처가 중생이 되는 이게 하나라는 소리입니다.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이 험악한 것도 성을 내고 주먹질을 한다고 험악한 게 아니고, 대립 갈등하고 남과 차별하고 비교하는 사람, 이게 험한 겁니다. 많이 가졌으면 많이 가진 대로, 적게 가지면 적게 가진 대로, 형편대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원하면 얼마든지 더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없이 비교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대로 험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지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가진 것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치도 양변을 여의지 못한 자리가 우치고, 험악하다는 것도 결국은 양변을 여의지 못한 자리가 험악한 자리입니다. 그러면 부처가 중생이 됩니다. 그 자리가 나도 너도 없고, 시비도 없고 선도 악도 초월한 걸 알게 되면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겁니다. 평등한 걸 알게 되면 비교하지 않게 되지요. 비교하면서 고통을 느끼거든요. 비교하지 않고 평등하다는 걸 알면, 그 고통이 안개 걷히듯이 싹 걷히잖아요. 안개가 걷히면 해가 나듯이 아주 밝은 지혜가 나옵니다. 그게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안개가 걷히는 것이 진공이고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은 묘유입니다. 있다 없다, 너다 나다를 제거하는 것을 진공이라고합니다. 그 제거한 자리에 밝은 지혜가 나와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고 그 차별된 경계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끄달리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면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보다 좋은 게 앞에 나타나면 열등의식에 빠지는 차별경계에 떨어져서 고통을 느꼈는데, 평등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 끄달리지 않고 자유자재합니다. 그래서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가 됩니다.

  만약 한 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야 부처다”라고 《금강경》에 그러거든요. 부처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다 중생이다’ 구별하는 게 없으면 부처다 이거예요.
  삼십이상三十二相이 굉장히 잘난 거잖아요. 그런데 삼십이상이 삼십이상이 아니면 삼십이상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삼십이상에 미달한 사람이나 삼십이상을 달성한 사람이나, 둘 다 초월한 그것이 진짜 삼십이상이지, 삼십이상에 도달해 있는 사람만 삼십이상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거는 삼십이상에 미달한 것과 상대가 되기 때문에 삼십이상이 안 됩니다.

  제일第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이 제일이 아니기 때문에 제일이다. 제일이 있고 제일 하下가 있고, 그렇게 보면 그건 제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봐야 되느냐? 제일도 없고 제일 하도 없다는 걸 아는 그것이 제일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자꾸 얘기하는데 정견만 깊이 갖추고 가치관이 바뀌면 저절로 공부가 됩니다. 신도들이 “스님, 화두를 어떻게 들고, 참선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물으면, “그런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라. 장소, 형식 이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활을 통해서 바쁘지 않고 여유 있을 때만이라도 화두를 챙기면서 공부를 해봐라 그것이 진짜 공부될 거다”라고 합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것은 잘못하면 하기 위해 하는 게 되어 버리거든요. 공부하기 위한 공부,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기보다 폼 잡는 데 더 신경을 씁니다. 하기 위한 공부, 그건 백날 해도 안 됩니다.
  그리고 동중動中에서 공부 못 하는 사람은 정중靜中에서도 공부 못 합니다. 뜻이 있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선방이나 수행하는 장소에서 어떤 형식에 자꾸 얽매이는데 이걸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 글은 주지 스님들이 많이 보시니까 생활을 통해서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참선을 하셔도 되고, 생활하다가 여유 있고 쉬는 시간이라든지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염불도 그렇게 해도 되고, 주력을 그렇게 해도 됩니다. 포장은 다르지만 염불이나 주력이나 참선을 하면 우리 의식이 적적성성寂寂惺惺으로 변해가는 건 똑같습니다. 그러면 포장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법인가? 포장 껍데기 벗기면 알맹이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적적성성 공부는 불교공부밖에 없고요. 외도外道공부는 대혜 스님이 말하듯이 적적寂寂 공부만 하는 거예요. 그건 자유자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깊은 한 곳에 들어가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 작용에 나와서 자유자재는 절대 안 됩니다. 그건 부처님이 증명합니다. 부처님이 웃다카 라마풋다와 알라라 칼라마에게 가서 깊이 적정寂靜 공부를 했던 분이거든요. 적정 공부해서 삼매에 들어갔을 때에는 참 편안했지요. 그러나 깨어나서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자유자재가 되지 않는 거예요. 경계에 끄달리고 지배받게 되고, 그래서 그분이 웃다카 라마풋다와 알라라 칼라마가 붙잡아도 뿌리치고 독자적으로 한 것이 적적성성 공부입니다. 이 공부를 성취하고 나니 어디에 가든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자유자재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비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비교하지 않는 마음이 굉장히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신도님들도 정견만 심어주면 자연적으로 생활에서 자기도 모르게 공부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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