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전게傳偈(2) 게송을 전함

 
  제사조 도신 스님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꽃씨에 나는 성품〔有生性〕 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도다.
  앞에서 ‘나는 성품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는 나는 성품이 있어 가지고 땅 위에 꽃과 종자가 난다고 했습니다. 꽃과 종자가 나는 것은 세 가지가 어울려서 생기는 거지요. 성품이 있고 꽃이 있고 종자가 있고, 이 세 가지가 어울려서 나다가 안 나다가 하는데요. 그것이 앞의 인연 세 가지입니다. 우리 이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몸뚱이가 없어요. 이게 그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중도연기를 말합니다. 앞에서도 중도연기 얘기를 충분히 했습니다마는, 여기는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물과 파도가 있는데, 그 물과 파도가 화합하지 않으면 일체가 없다. 연기緣起를 하기 때문에 파도가 있는 겁니다. 파도와 물의 연기로 본다면, 바람과 물이 화합해서 파도가 일어난 겁니다. 우리는 그 화합하는 것을 연기로 보는 겁니다.

  제오조 홍인 스님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유정有情이 와서 씨 뿌리니 무정無情이 꽃을 피우고
정도 없고〔無情〕 씨앗도 없나니〔無種〕
마음 땅〔心地〕에 또한 남이 없도다.
  또 철저히 공空을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유정은 작용하는 건데, 유정이 와서 종자를 내리니 무정에 꽃이 피어요. 물에서 파도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무정에 꽃이 피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생멸生滅하고 있기 때문에 정도 없고 종자도 없음이로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 파도가 언젠가 사그라지니까 정도 없고 종자도 없어요.
  심지에 또한 남이 없음이로다, 결국 그 자리는 양변을 여의어서 얻는 자리다. 오조 홍인 스님은 철저히 양변을 여읜 자리를 더 강조하신 것 같아요.

  제육조 혜능 대사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의 땅〔心地〕이 뜻의 씨앗〔情種〕을 머금으니 법의 비가 꽃을 피운다.
  물 속에 파도가 일어날 수 있는 작용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더라도 파도가 일어나지 않겠지요. 물 속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일어나듯이 심지 자리도 마찬가집니다. 이건 쌍차雙遮를 말합니다. 쌍차 속에 작용하는 요소가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정종情種이라고 보면 됩니다. ‘정종을 머금어서 법의 비가 오니까 꽃이 핀다.’ 이것은 쌍차에서 쌍조雙照로 바뀌는 얘기로 보시면 됩니다.

  스스로 꽃 뜻의 씨앗을 깨달으니, 보리菩提의 열매가 스스로 이루는도다.”
육조 혜능 스님의 게송입니다. 그 뒤에 게송이 두 개 더 나오지요.

  혜능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내가 지은 두 게송을 들어라. 달마 스님의 게송의 뜻을 취하였으니 너희 미혹한 사람들은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라. 그러면 반드시 자성을 보리라.”
  혜능 대사가 뒤에 게송 두 개를 지어 놨는데, 달마 스님의 게송을 보면서 그 뜻을 너희들이 알았으니까 이 게송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게송을 의지하면 반드시 견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心地〕에 삿된 꽃이 피니
다섯 잎〔五葉〕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무명의 업을 지어
업의 바람〔業風〕에 나부낌을 보는도다.
  마음 속에 삿된 꽃이 핀다. 그러면 삿된 꽃이 피는 건 뭡니까? ‘나다-너다’‘있다-없다’ 양변을 마음 속에 일으키면 그것이 삿된 꽃을 피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엽五葉은 앞에서 말하는 다섯 조사가 아니고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그 오근五根으로 보면 좋겠어요. 그 오근이 식識을 따라서 함께 무명의 업을 짓게 된다. 지어 가지고 그 업풍 부는 데 입음을 볼 것이다. 그래서 여기는 ‘있다-없다’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보셔야 바로 보는 겁니다.

  둘째 게송에 말씀하셨다.
마음 땅에 바른 꽃이 피니
다섯 잎이 뿌리를 좇아 따르고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으니
장차 오실 부처님의 깨달음이로다.
  우리 자성자리에서 바른 꽃을 피우니, 바른 꽃 피는 건 뭡니까? ‘나다-너다’‘좋다-나쁘다’를 여읜 꽃이 피면, 이 소리입니다. 그러면 오근이 의식을 따라서 함께 반야의 지혜를 닦아, 장래에 부처의 깨달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양변을 여의는 것과 여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 양변에서 하면 우리가 무명 업을 지으면서 그 업풍을 따르면서 중생노릇을 하고 양변을 여읜 자리에서 그 오근이 의식을 따라 반야의 지혜를 닦으면 부처가 된다.
  그런데 앞에 ‘좋다-나쁘다’ 양변을 따라가는 것을 하기 때문에 무명 업도 짓고 업풍도 짓는다 했는데 실제는 착각입니다. 양변을 따라가든 양변을 여의든 우리 존재원리는 손톱만큼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똑같아요. 다만 우리가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착각해서 양변으로 가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 존재원리가 변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착각하듯이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무명 업을 짓고 업풍을 따라가고 있는 거거든요. 그건 우리가 착각이기 때문에 현실도 아니고 진짜도 아닙니다. 내가 무명 업을 짓고 업풍에 시달리니까 내가 굉장히 잘못된 사람으로 볼 수 있는데, 절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라도 착각을 빨리 깨야 합니다.
  이 착각 세계에서 세상 사람이 매일 총 칼 들고 싸우고, 정치권에서도 싸우고, 공장에서도 노다 사다 해서 싸우고 가정에서도 싸우고 매일 싸우고 있습니다. 그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이런 인류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고쳐 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불교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정말로 자부심도 가지고 부처님 법이 굉장히 위대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자부심과 원력을 가지고 나부터 그렇게 고쳐서 살고, 세상 사람들도 고쳐 가지고 삶을 살면서 ‘정말로 잘 살 수 있는 그런 세계를 만들어 보자’하고 실천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얘기할 때면, 이것을 많이 강조합니다. 업業이라는 게 본래 실체가 없어요. 죄라는 것도 그래요. 다만 우리가 착각에 빠져 업도 짓고 죄도 짓는 것이지, 그건 착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지은 죄업도 진짜가 아닙니다. 아무리 업을 짓고 극악무도한 사람이라도 우리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부처 그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앙굴리마라 같은 사람도 부처님을 만나 하루아침에 360도로 달라져서 좋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더러 미흡한 게 있고, 실수한 게 있더라도 그건 우리가 착각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나하고 상관없어요. 내 본래 진짜 모습은 부처다, 그런 자부심을 갖고 수행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종입니다. 업이 있다 죄가 있다 이러면 또 한 단계 내려가서 공부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차례를 따라서 하려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이 ‘선종에서 보는 것이 부처님이 보는 시각과 가장 가깝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육조 스님께서 게송을 말씀하여 마치시고 대중을 해산시켰다. 밖으로 나온 문인들은 생각하였으니, 대사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으실 것임을 알았다.
  그때 이미 당신은 8월에 간다고 선언할 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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