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참됨과 거짓眞假(2)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여읜 마음이 곧 진실이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이 없으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유정은 움직일 줄 알고, 무정은 움직이지 않으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으니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무정과 같아 부처의 씨앗도 없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반드시 부동하여야 한다.
만약 깨달아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작용이다.
모든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 말하노니 노력해서 모름지기 뜻을 써,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앞의 사람과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고 환희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다. 만약 다투면 도의 뜻을 잃으리라.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기 본성이 생사에 들어간다.

  스님들이 예배하고 대사께 게송 남기시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가졌다.
  게송에 말씀하셨다.
  모든 것에 진실이 없나니

  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존재는 실체가 없습니다. 계속 반복하며 생멸할 뿐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 몸뚱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있다’고 보아 영원하기를 바라거든요.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진실함이 있으면 고정불변하겠지만, 실체가 없어서 모든 것이 다 변한다. 변할 뿐 아니라 그 본질을 보게 되면 실체가 없고 공이다. 이것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하지요. 요새는 남방불교 때문인지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고苦라 한 것은 잘못된 겁니다. 고苦로 보면 손가락에서 본 거예요. 달 입장에서 보면 열반적정입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남방에 가서 공부하고 온 분들은 대승불교가 열반적정으로 본다고 비판하거든요. 자신이 손가락에서 보기 때문에 잘못 본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지요. 사실 손가락은 달을 바로 보라고 제시한 방편이고 허구예요. 그건 진실이 아니거든요. 아직도 착각을 깨기 위해 수행하는 입장이지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진리도 아니고요.
  그래도 대승불교는 달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열반적정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서도 존재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진실한 게 없습니다. 다 변해갑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에요. 대부분 세상 사람은 다 죽어도 자기는 안 죽는 걸로 생각해요.
  어쨌든 누구든지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절에 재 모시러 오는 분들도 보면 꼭 우리 가족만 죽는다고 생각하고 막 울고 그러거든요. 세상 사람들 다 죽어요. 안 죽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어떤 여인이 죽은 아들 때문에 깊은 시름에 잠겨 있자 어느 집이든지 사람 안 죽은 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 오라 했지요? 사람 안 죽은 집이 없잖아요.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출가하지요. 다 죽습니다. 다 갑니다.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진실을 보려고 하지 말라.
  만약 진실을 본다 해도 그 보는 것은 다 진실이 아니다.
그건 착각이다. 진실한 것은 없다. 진실한 것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잘못된 것이다.

  만약 능히 자기에게 진실이 있다면 거짓을 여읜 마음이 곧 진실이다.
진실한 게 있다면 거짓을 여읜 것이다.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를 여읜 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그 자리를 아는 겁니다. 그 자리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지요. 계속 변하면서 변하는 그것에서 그 자리를 보는 것이 진실한 것이지 우리가 말하는 고정불변한 그런 진실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육조 스님께서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고 했는데 그 자리에서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그런 것이 있거든요. 그것을 체體·용用이라거나, 선문禪門에서는 살殺·활活이라고 하지요. 여기에서도 앞의 것은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입장에서 말했다면 그 뒤의 것은 생하고 멸하고, 가고 오고하는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을 말한 겁니다. 이것이 둘이 아니고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거짓을 여의지 않으면 진실이 없으니,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앞에서 말했지만, 작용하는 게 있어요. 거짓을 여의지 않는 그 자리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항상 변하고 있는 겁니다.

  유정은 움직일 줄 알고, 무정은 움직이지 않으니,
만약 움직이지 않는 행을 닦는다면 무정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고, 가는 곳도 없고 오는 곳도 없다고 했으니, 움직이지 않는 부동행不動行을 닦는다고 우리가 가만히 있게 되면, 무정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갖고 수행하면 단멸斷滅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뒤에 말을 바로잡아줍니다.

  만약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으니

  앞의 부동행과는 좀 다릅니다.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다. 이것이 전부 중도연기예요. 양변을 여읜 자리는 움직이는 곳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함께 있고, 움직이지 않는 곳에 움직임이 함께 있습니다. 이걸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도 하지요.
  계속 중도연기를 얘기하고 계십니다. 혹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니까 무정물이 움직이지 않는 것같이 단멸에 떨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는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는 것이 진짜 움직이지 않음〔不動〕입니다.
  앞에서 파도와 물을 비교했지요. 큰 바다에서 파도가 천 개 만 개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 파도가 일어난 것은 움직인 것이죠? 그 움직이는 속에 안 움직이는 물이 있어요. 그게 쌍조雙照입니다. 그리고 그 파도가 가라앉으면 움직이지 않잖아요. 그 움직이지 않는 곳에 또 움직이는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쌍차雙遮라 합니다.
  이것을 손바닥과 손등으로 비유하면, (손을 들어 손바닥을 대중 앞에 보이면서) 이게 움직이는 것이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인 손등이 뒤에 있지요. (반대로 손등을 보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나타난다면, 움직이는 손바닥이 뒤에 항상 같이 있습니다. 이것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달마 스님이 “밖으로 인연을 쉬고〔外息諸緣〕 안으로 헐떡거림을 쉬어서〔內心無喘〕 마음을 담벼락 같이 하면〔心如障壁〕 가히 도에 들어간다〔可以入道〕” 라고 하신 말을 ‘가만히 있고 아무 감각이 없는 것이 도’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 대혜 스님께서는 《서장》에서 적적만 하면 ‘묵조사사배默照邪師輩’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적적만 공부하면 잘못된 공부입니다.

  그런데 실제 깨달음의 게송을 손가락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망을 뚫고 나온 금고기”라고 하니까, 금고기는 도인이고 좋다고 보고, 망은 번뇌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번뇌인 망이 있고 또 도인이 있다고 보면, 진과 망이 나눠지고 벌어지잖아요. 그 자리는 진과 망이 없어요. 양변을 여읜 자리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도인도 없고 해탈도 없고 구속도 없고 지혜도 없고 망상도 없습니다. 그 자리가 우리 본래 자리예요.
  이것을 이분법적으로 ‘중생이다 부처다’ 나눠 놓는 것은 사실 그 게송을 볼 자격이 없는 분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잘못하는 것입니다.

《서장》에도 “밖으로 인연을 쉬고〔外息諸緣〕 안으로 헐떡거림을 쉬어서〔內心無喘〕 마음을 담벼락 같이 하면〔心如障壁〕 가히 도에 들어간다〔可以入道〕.” 이걸 방편으로 봐야 되지 법으로 보면 안 된다는 얘기를 아주 강조했습니다.
  또 깨달음의 세계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不動〕이란, 아까 그 스님처럼 아무 감각이 없는 게 아니고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게 진짜 부동不動함이다 그 얘기입니다. 아까 파도와 비교해드렸지만 그 파도가 천개 만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천 개 만 개 일어난 파도가 모양이 크든 작든 그 속에 물이 있습니다. 그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에요. 파도가 일어난 것은 작용인데, 작용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부동한 걸 봐라.
  그런데 우리는 모양, 형상만 보고 ‘나’라 생각하고 본질은 못 보고 살아요. 그래서 바로 보지 못하고 자꾸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계속 갈등하고 대립하고 투쟁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정과 평화가 오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도 진짜 우리가 부동한 걸 보려면 동하는 위에서 부동한 걸 봐야 진짜 부동한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게 부동이 아닙니다.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라면 무정과 같아 부처의 씨앗도 없다.
그건 완전히 단멸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능히 모양을 잘 분별하되 반드시 부동하여야 한다.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모양의 파도가 있더라도 그 파도의 모양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아느냐? 반드시 부동하지 않는 본질 그 자리를 봐야 한다.
  파도가 천 개 만 개 일어나더라도 그 속에 담겨 있는 물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짚으로 가마니, 짚신, 새끼 등 어떤 모양을 만들더라도 그 원료인 짚을 보면 하나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실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모든 존재에게 보편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차별하고 분별하며 시비를 일삼지 않습니다.

  만약 깨달아 이 견해를 지으면, 이것이 곧 진여의 작용이다.
  양변을 여읜 자리입니다. 좋다 나쁘다, 나다 너다를 여읜 자리를 보아 깨치게 되면, 큰 파도든 작은 파도든, 예쁜 파도든 밉게 생긴 파도든 모두 평등합니다. 본질은 물이니까요.
  이걸 깨닫게 되면 이데올로기 갈등이라든지, 흑백의 인종 갈등이라든지, 민족 갈등, 또 종교 갈등,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집니다. 그래서 세상은 정말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됩니다.
  지금 세상에는 불교가 정말로 필요한 종교입니다. 설득력도 있고요. 우리가 ‘죽어서 천당 가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극락 가자’ 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의 세계가 저 밖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그 본질 자리를 단박에 보면, 서로 더불어서 함께 잘 사는 길이 당장 열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설득력도 있고, 이 세상을 좋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원리를 갖고 있는 종교이면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첫째로 부처님 법을 이해해서 정견을 갖추고 그 시각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정견을 세우지 않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 부처님 법을 이해해서 정견만 갖추더라도 자기 스스로 조금씩 달라집니다.
  정견을 갖추는 것을 비유하자면, 우리가 운동장에 가면 백 미터든지, 천 미터든지 달리는 코스가 있습니다. 정견을 갖추면 그 날부터 그 부처님 땅인 운동장에서 염불 코스든지, 참선 코스, 봉사 코스, 주력 코스를 선택해서 비로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정견도 안 세우고 불교도 모르는 분들이 산으로 가야 하는지, 강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가는 그건 정말 힘든 길이거든요.
  대승불교의 정견은 《반야심경》이고, 《반야심경》 중에서도 “오온개공五蘊皆空”이 정견입니다. 왜 오온개공이 정견이냐?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모두 공空입니다. 아주 간단해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분을 아직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도를 배우는 사람에게 말하노니 노력해서 모름지기 뜻을 써, 대승의 문에서 도리어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모든 도를 배우는 사람은 정견을 갖추어서 그 정견의 뜻을 잘 노력하고 쓰라. 이 대승문에서 생과 사의 양변을 갈라놓는 생사의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 이겁니다.

  앞의 사람과 서로 응하면 곧 함께 부처님 말씀을 의논하려니와 만약, 실제 서로 응하지 않으면 합장하고 환희하라.
  앞의 사람〔前頭人〕은 선배 도인을 말하는데, 선배 도인의 견해와 서로 맞아 들어가면, 즉 계합契合하면, 같이 하라. 합장하고 환희하는 건 존경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니 그렇게 하라.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다. 만약 다투면 도의 뜻을 잃으리라.
이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이고 조사 스님 가르침이지요. 여기에는 싸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돈오돈수 돈오점수’하면서 싸워요. 그렇게 싸우면 ‘돈오점수 돈오돈수’를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가르침은 본래 다툼이 없다. 만약 다투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이다.

  미혹함에 집착하여 법문을 다투면, 자기 본성이 생사에 들어간다.
미혹한 것이 뭐냐? 양변에 있는 것이죠. 그냥 막연하게 미혹하다 생각하는데, 양변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은 양변을 여읜 것이죠. 법문에 다투면, 양변에서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갈등하고 대립하면, 자기 성품이 생사生死에 들어가 버린다.
  나는 이 《육조단경》을 보면서 당시 스님들이 표현은 다르더라도 정말로 그 자리에서 모든 걸 표현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아주 감명 깊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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